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은 지난 4월 8일 인천 삼산체육관에서 정관장을 상대로 2024-25시즌 도드람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5전 3승제) 5차전 홈 경기를 치렀다.
흥국생명은 이날 정관장에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3-2로 이겼다.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흥국생명은 챔피언결정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또한 정규리그 1위에 이러 이날 승리로 통합 우승도 달성했다.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코트로 나온 흥국생명 그리고 한국 여자배구 '간판스타' 김연경도 이날 승리로 진정한 '라스트 댄스'를 완성했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구단 사무국 등은 우승이 확정되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지원스태프에 속해 있는 한 사람도 우승 기쁨을 함께 나눴다. 주인공은 이주현 흥국생명 전력분석관(이하 이 분석관)이다.
그는 '더스파이크'에 챔피언결정전 5차전 종료 후 들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 분석관은 "앞서 치렀던 챔피언결정전에서 아쉽게 우승을 놓친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기쁨과 감격이 더욱 컸다"며 "정규리그 1위를 일찍 확정했지만 (챔피언결정전은) 언제나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챔피언결정전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흥국생명은 이번 챔피언결정전에서 1, 2차전을 잡고 우승 9부 능선에 올랐다. 그러나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3, 4차전을 연달아 내줬고 시리즈 전적 2승 2패 동률이 됐다. 이 분석관을 비롯해 흥국생명 선수와 코칭스태프, 사무국 모두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다.
2022-23시즌 챔피언결정전이다. 흥국생명은 당시 정규리그 1위로 챔피언결정전에 선착했다. 3위로 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한국도로공사(이하 도로공사)와 봄배구 '마지막 승부'에서 만났다. 1, 2차전을 이겨 비교적 쉽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까 싶었다. 그러나 3~5차전을 내리 내주면서 기쁨이 아닌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흥국생명은 V-리그 남녀부를 통틀어 최초 역스윕 패배 사례 주인공이 됐다. 그랬기에 이 분석관도 그렇고 선수단 모두가 '이번만큼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고 최상의 결과와 마주했다.
그는 "정관장은 확실한 팀 컬러를 가지고 있었다. 분석을 통해 흐름을 예측하더라도 실제 경기에서는 대응이 쉽지 않은 팀이었다"며 "되돌아보면 시리즈 내내 여러 차례 고비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해줬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과 코칭스태프도 같은 마음으로 모든 순간을 준비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던 것 같다"고 이번 챔피언결정전을 되돌아봤다. 이 분석관은 "무엇보다 김연경 선수의 '라스트 댄스'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그 누구보다도 기쁘고 벅찼던 순간"이라고 덧붙였다.
이 분석관은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그리고 시리즈를 치르는 동안 상대 전력을 분석하며 초점을 맞췄던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정관장은 두 외국인 선수(메가, 부키리치)의 공격 점유율이 높은 팀"이라며 "따라서 이 두 선수에게 올라가는 다양한 볼 유형과 전개 패턴을 분석했다. 여기에 맞춰 우리팀 선수들의 블로킹 위치와 수비 위치를 세밀하게 설정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팀이 갖고 있는 장점과 강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도 함께 준비했다"며 "세터가 어떻게 상대 블로킹을 피하고, 공격수들이 어떤 해결책을 가져가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서브는 경기 흐름에 따라 상대 리시브 라인을 어떻게 흔들 것인지까지 자세하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이 분석관은 V-리그에서 남자팀과 여자팀에서 모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경력을 갖게 됐다. 그는 남자부 대한항공에서 전력분석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2017-18, 2020-21, 2021-22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함께 했다. 이후 흥국생명과 인연을 맺어 여자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에서 두 차례 준우승을 경험한 뒤 마침내 여자팀에서도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됐다.
이 분석관은 베구 선수 출신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 체육학과에 다니던 당시 스포츠 전력분석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구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를 즐겨보며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배구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특히 배구 분석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고 얘기했다.
대학 재학 당시 V-리그 경기를 직접 본 것도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 분석관은 "대전을 연고로 둔 삼성화재와 정관장 홈 경기에 저희 학교가 경기 운영 도우미로 참여했다. 당시 현장에서 프로팀 전력분석관들에게 직접 인사를 했다. 그런 인연이 계기가 됐고 이후 방송국에서 전력분석 기회를 얻었고 대한항공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 분석관은 SBS스포츠에서 전력분석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이 분석관의 '사수'라고 할 수 있는 이가 이현정 전 전력분석관이다. 이현정 분석관은 KT&G(현 정관장)의 V-리그 초대 우승팀 멤버이기도하다. 아웃사이드 히터와 리베로로 뛰었고 선수 은퇴 후 전력분석관 길을 걸었다. 김재헌 전 삼성화재, 우리카드 현 OK저축은행 코치와 함께 프로배구에서 1세대 전력분석관에 속한다. 그는 이후 여자배구대표팀, IBK기업은행에서 전력분석관으로 활동했다.
이 분석관은 "V-리그 사상 처음으로 남녀팀 모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한 분석관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고 웃었다. 그는 "되돌아보면 후회 없이 걸어온 길이고, 그 여정 속에서 정말 많은 보람을 느꼈다. 분석은 단순한 데이터 축적이 아니라고 본다. 결국 선수들이 얼마나 그 내용을 신뢰하고 따라주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경험 많고 노련한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대한항공과 흥국생명에서 여러 외국인 사령탑(로베르토 산틸리, 토미 틸리카이넨, 아본단자 감독)과 협업을 통해 해외 분석 기술과 툴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은 큰 자산으로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대한항공과 흥국생명을 거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이번 챔피언결정전 5차전이다. 그는 "이 경기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한 경기였다. 우리 모두가 지난 두 시즌 연속으로 놓쳤던 우승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간절한 마음이 집중력으로 이어졌고,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교체로 코트에 들어간 선수들까지 각자 역할을 완벽히 해낸 것 같다. 정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경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 순간이 제 인생에서도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게 됐다"고 얘기했다.
이 분석관은 자신의 사용 중인 전력분석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Datavolley4', '발리스테이션', 다트피시(Dartfish), 발리매트릭스(VolleyMetrics)다. 그는 "데이터볼리는 가장 핵심적인 분석 툴이다. 공이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입력하고 이를 기반으로 감독, 코칭스태프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실시간 데이터 입력과 캠코더 딜레이 영상 분석을 통해 경기 중 피드백도 즉시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발리스테이션은 데이터볼리와 유사한데 시각화된 데이터 제공이 강점이다. 다트피시는 팀 연습 과정에서 선수들이 본인의 동작을 딜레이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석용 프로그램이다. 발리매트릭스 해외 리그 영상, 스카우팅 리포트, 기록지를 공유할 수 있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시즌 중에는 상대팀 분석에, 시즌 후에는 외국인 선수 선발 시 활용한다. 또한 이와 연동된 'HUDL'이라는 모바일 앱을 통해, 선수들이 원하는 장면을 직접 필터링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분석관은 배구 전력분석관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도 조언했다.그는 "아직까지는 전력분석관이 되기 위한 정형화된 루트는 없다. 그러나 배구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더불어 데이터 분석 역량, 컴퓨터 활용 능력(이 분석관은 특히 엑셀 작업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꾸준함이 무엇보다 필요한 직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수 출신이 아니라면 방송국 분석 파트에서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전력분석 관련 세미나나 한국배구연맹(KOVO) 주관 강의 등이 열릴 때에도 적극 참여를 권한다. 무엇보다도 이 일을 오래 하려면 끈기와 배구를 향한 열정이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분석은 숫자를 다루는 일이지만,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_류한준 기자
사진_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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