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7일 일본에서 발행되는 영자 일간지 ‘저팬타임스’는 이례적으로 배구 소식을 전했다. 2000년대 일본여자배구 간판스타 기무라 사오리 현역 은퇴 관련 기사를 게재한 것이다. 그는 지난 시즌 이미 은퇴 결심을 굳혔었다. 하지만 한 시즌을 더 뛰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올림픽 무대라고 여긴 2016 리우올림픽 때문이다.
기무라는 리우올림픽이 끝난 뒤 소속팀 토레이 애로우즈 유니폼을 입고 다시 코트에 나섰다. 시즌 일정이 끝나자 미련 없이 코트를 떠나기로 했다. 기무라는 ‘저팬타임스’ 보도 전날(3월 6일) 열린 NEC 레드로케츠와 V프리미어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그는 팀 내 가장 많은 16점을 올리며 주전 아웃사이드 히터로 제 역할을 다했다. 토레이가 NEC에게 세트스코어 1-3으로 패하는 바람에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피날레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NEC전이 끝난 뒤 “어떻게 선수생활을 마무리 하느냐가 중요한 일”이라는 짧은 소감을 전했다. 그는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 기무라와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던 마나베 마사요시 일본여자배구대표팀 감독은 “대표팀에서 진정한 주장은 기무라가 유일했다”라며 “그가 주장으로서 보인 모범적인 행동과 함께 긍정적인 영향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무라는 1986년생으로 코트를 떠나기에는 아직 한창 나이다. 동갑내기로 올림픽을 포함해 월드그랑프리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마주친 황연주(현대건설)도 V-리그 코트에서 뛰고 있다. 다소 이른 은퇴 결정으로 V프리미어리그는 2017~2018시즌부터 ‘포스트 기무라’ 시대를 맞게 됐다.
출범 10년 넘긴 V-리그, 선배에게 배워야
일본리그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배구는 미국에서 고안된 운동으로 보급 초기 시절 동유럽 지역인 구 소련(현 러시아)을 비롯해 체코슬로바키아(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 폴란드 등이 강 팀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은 배구가 하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첫 대회인 1964 도쿄올림픽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남자대표팀이 동메달을, 여자대표팀은 금메달을 각각 목에 걸며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일본배구는 전략과 전술에서도 최고 자리에 있었다. 1984 LA올림픽에서 미국남자배구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덕 빌 감독이 들고 나온 리셉션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배구는 국제적인 흐름을 주도했다.
도쿄올림픽에서 선전으로 일본배구협회(JVA)는 1965년 자국 리그를 출범시켰다. 리그를 주관하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이후 1993년까지 운영되던 일본리그는 1994년 변화를 맞는다.
‘전일본 V리그’로 명칭을 바꿨다. 국내 V-리그처럼 프로화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지만 세미프로 형식으로 남녀부 최상위리그를 구성했고 외국인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전일본 V리그 출범 만 10년을 맞은 지난 2005년 변화를 줬다. 리그 명칭을 V프리미어리그로 변경했고 1부와 2부리그로 나눠 승강제를 도입했다. 현재는 V프리미어리그가 1부리그, 챌린지리그가 2부리그에 해당한다. 챌린지리그에서도 참가팀 사이에 경쟁을 위해 챌린지Ⅱ리그도 운영한다.
1부리그는 남녀부 각각 8개팀이 뛴다. 포스트시즌은 6개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자웅을 겨룬다. 남녀부 최하위(8위)팀은 다음 시즌 챌린지리그로 내려간다. 그 자리를 챌린지리그 1위팀이 대신한다.
김연경(페네르바체)이 뛰어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JT 마블러스는 2014~2015시즌 종료 후 챌린지리그로 강등됐다가 올 시즌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해 정규리그 4위를 차지했다. 챌린지리그는 남녀부 각각 8팀으로 구성됐다. 프리미어리그와 참가팀 수가 같다.
챌린지Ⅱ리그는 올 시즌 남자부 7개, 여자부 5개팀으로 운영됐다. 1부리그부터 3부리그격으로 볼 수 있는 챌린지Ⅱ리그까지 모두 44팀이 V프리미어리그라는 큰 틀에서 함께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V프리미어리그, 현실에 만족하지 않았다
V-리그는 지난 2005년 출범 전부터 일본리그를 많이 공부했다. 프로화를 추진하던 한국배구연맹(KOVO)은 체계적인 리그 운영을 참고했다. 리그간 교류 활동에도 신경을 썼다. 양국 시즌 일정이 끝난 뒤 치러진 한·일 톱매치와 심판 교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V프리미어리그는 2000년대 중후반 다소 정체기를 맞았다. 특히 외국인선수 쪽이 그랬다. V-리그에서 톱클래스급 선수를 데려온 영향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흐름이 바뀌고 있다. 일본리그는 중국리그와 함께 아시아에서 ‘큰 손’으로 자리잡고 있다.
V-리그가 외국인선수 선발 방식을 트라이아웃제로 변경한 뒤부터 톱클래스로 평가 받는 선수들은 일본 또는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좋은 예가 삼성화재에서 뛰었던 가빈(캐나다)과 한국전력 유니폼을 입었던 비소토(브라질)다.
가빈은 2010~2011시즌 종료 후 일본리그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몸값 때문이었다. 당시 가빈이 소속된 에이전트사인 ‘SIMGARTEN’은 65만 달러를 불렀다. 결국 가빈의 일본리그 진출은 없던 일이 됐고 그는 삼성화재 유니폼을 계속 입었다. 그러나 비소토는 달랐다. 2013~2014시즌 종료 후 V-리그를 떠난 그는 일본리그 JT 썬더스에 입단하며 최고액 선수가 됐다. 그는 두 시즌 동안 뛰었고 연봉은 수당까지 포함해 90만 달러 정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 살림살이에 따라 데려온 외국인선수 몸값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V프리미어리그는 중국리그와 견줘도 전혀 손색없는 외국인선수 수준을 보이고 있다,
외국인 코칭스태프 발탁도 V-리그와 차이가 있다. V-리그는 V프리미어리그와 비교해 문호가 덜 개방된 편이다. 지난 시즌 대한항공이 슈빠와 조르제 코치(이상 브라질)를 뒀고 올 시즌 괴르첸 코치(네덜란드)를 데려오긴 했으나 감독으로 눈길을 돌리면 외국인사령탑은 찾을 수 없다. 여자부 흥국생명 사령탑을 맡았던 반다이라 마모루 감독(일본)이 유일하다. 올 시즌 현대캐피탈에서 체력 담당 트레이너로 활동 중인 조세(브라질)는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에서 감독대행을 잠깐 맡은 경험이 있다.
반면 V프리미어리그는 유연한 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브라질 이탈리아 등 남미와 유럽 등 배구 강국 출신으로 꼽히는 지도자들이 일본리그를 찾았다. 올 시즌에도 V프리미어리그는 남녀부를 모두 포함해 외국인사령탑이 4명이나 활동하고 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지속적인 리그 확장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눈에 띄는 움직임이나 성과는 현재 없지만 목표를 그렇게 두고 있다. 당장 2017~2018시즌부터 여자부는 남자부와 별도로 경기 일정이 잡힌다. 향후 여자부가 독립 운영될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V프리미어리그가 보여주고 있는 유연성과 개방성 등은 충분히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아시아를 넘어’이란배구
아시아배구연맹(AVC) 소속 회원국 중에서 ‘탈 아시아’에 성공한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은 예전부터 이를 목표로 뒀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탈 아시아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럽이나 중남미 선수들과 체격조건이 비슷한 호주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탈 아시아에 가장 근접한 나라는 따로 있다. 바로 이란 배구다.
이란은 중동에서도 강한 전력을 꾸린 팀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랬다. 그때만해도 ‘오일 머니’를 앞세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가 중동 배구의 맹주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이 국가들은 일찍부터 아시아 배구 흐름을 주도한 일본을 비롯한 한국 지도자를 영입해 국가대표팀 전력을 다졌다. 이란 배구는 중동 지역에서도 2류에 속했지만 지난 2002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를 시작으로 실력을 끌어 올렸다.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이 이란남자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부터 기량 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 박 감독 이후 세르비아 출신 가이치 감독이 바통을 이어 받았을 때 잠시 주춤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침체기는 길지 않았다.
자국 지도자를 거쳐 아르헨티나 출신 명장인 훌리오 벨라스코 감독이 다시 팀을 맡으며 아시아를 뛰어넘어 이제는 유럽배구와 견줘도 결코 밀리지 않는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란 배구의 성장 토대는 국민적 인기에 있다. 박 감독은 “이란에 처음 왔을 때 배구 인기는 별로였다”라며 “배구를 하는 사람들만 신경을 쓰는 ‘그들만의 리그’에 가까웠다”라고 당시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란이 아시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부터 배구 인기는 조금씩 올라갔다.
이란의 ‘국기’라 할 수 있는 종목은 레슬링이다. 축구도 당연히 인기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배구가 축구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이란을 처음 찾은 배구 에이전트는 예상하지 못한 배구 열기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09년 이란을 직접 방문했던 한 에이전트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도시가 아닌 시골에 가면 배구 인기를 더 잘 확인할 수 있다”라며 “골목 곳곳에서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보다 전신주 사이에 네트를 만들어 놓고 패스와 리시브를 하며 미니배구 경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박 감독도 이런 사실에 동의한다. 그는 “선수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배구를 즐기는 사람이 예전과 비교해 정말 많이 늘어났다”라며 “특히 어린이들이 배구를 쉽게 접한다”라고 했다. 배구를 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은 부족하고 좋지 않지만 열정만큼은 어느 나라에 견줘 부족하지 않다는 의미다.
박 감독은 “풀뿌리 배구만 따져봐도 이란과 한국 차이는 크다”라며 “성인대표팀 뿐 아니라 청소년과 유스팀에서도 이란은 예전과 달리 많이 성장했고 전력 상승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못지 않은 뜨거운 배구 열기
이란리그의 정식 명칭은 이란슈퍼리그(ISL)이다. 확실한 승강제를 실시하고 있지 않지만 1부리그 격인 ISL에는 12개 팀이 속해 한 시즌을 치르고 있다.
리그 역사는 제법 오래됐다. 지난 1975년 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명칭은 달랐다. 파사르가드컵으로 이름이 붙였다. 미국의 영향 때문에 리그 출범 초창기에는 제법 인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침도 있었다. 이란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호메이니 주도로 지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리그가 중단됐다. 1980년에는 이웃 나라인 이라크와 전쟁이 일어났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장장 9년을 끌었다. 그 기간 동안 배구리그는 열리지 못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조용하던 코트에는 배구공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사르가드컵은 ‘퍼스트 디비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운영됐다.
ISL은 지난 1997~1998시즌 출범했다. 이란배구협회가 대표팀 전력 강화와 함께 자국 리그 재정비를 시작했다. ISL은 2000년대 중반부터 문호를 개방했다. 외국인선수 및 지도자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앙핼 데니스(쿠바) 호드리강(브라질) 로드리고 께로아(아르헨티나) 프란세스코 바리벤티, 발레리오 베르미글리오(이상 이탈리아)등 해외 배구계에서 이름값이 있는 선수들이 이란리그에서 뛰었다. V-리그에서 뛰었던 외국인선수들도 이란리그와 인연을 맺었다. 다날 밀류세프(불가리아) 블라도 페트코비치(세르비아)가 그 주인공이다.
이란리그 최고 명문팀은 파이칸이다. ISL 출범 이후 지난 시즌까지 리그 우승 12회를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흥 강호로 자리잡은 사르마에 뱅크 테헤란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사르마에 뱅크 테헤란은 지난 시즌과 올 시즌 연속으로 파이칸을 제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란리그의 가장 큰 특징은 체육관을 찾은 관중들의 열기다. 종교적인 이유로 여자 관객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에 남자들만 들어찬 체육관에서는 과열된 응원으로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박 감독은 “리그 라이벌 팀끼리 맞대결은 이탈리아나 폴란드 등 유럽에서도 배구 인기가 높은 곳과 견줘 결코 손색 없는 열기를 자랑한다”라고 말했다.
글/ 류한준 조이뉴스24 기자
사진/ 일본배구협회·아시아배구연맹 홈페이지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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