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2023년도 V-리그 여자부 FA(자유계약) 선수 영입이 마감된 직후였다.
예상을 깨고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도로공사는 FA 대상 선수 5명 가운데 박정아와 정대영을 각각 페퍼저축은행, GS칼텍스에 빼앗겼다. 배유나 문정원 전세얀은 잡았어도 큰 전력손실이었다. 정대영은 B등급(연봉 9000만원)으로 보상선수도 없다. 페퍼저축은행에서 박정아의 보상선수를 데려오는 방법 외에는 전력을 보강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김종민 감독의 고민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전화가 왔다. 지난 시즌 페퍼저축은행으로 옮겨간 이고은이었다. 팀은 떠났지만, 여전히 좋은 관계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전화였다. 김종민 감독은 이고은이 팀을 떠날 때 좋은 대우를 받고 가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를 보내면서 연봉 200%와 함께 아웃사이드 히터 유망주 김세인을 보상선수로 받았다. 이고은은 도로공사와 김종민 감독에게 큰 선물을 남기고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독님, 저 데려가실 거예요?” 이고은은 김종민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정아의 보상 선수로 페퍼저축은행에서 누군가를 데려와야 하는데 도로공사와 김종민 감독의 선택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이고은이 자발적으로 연락해 도로공사의 생각을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미리 한 번 찔러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종민 감독은 “너 안 데려가”라고 대답을 해줬다.
당시만 해도 김종민 감독은 생각이 복잡했다. 보상선수 명단에 누가 들어있느냐에 따라 여러 계획이 나왔다. 일단 마음에 드는 선수가 없으면 300%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 이 돈은 다음 시즌 대형 아웃사이드 히터 영입에 투자할 계획도 세웠다. 도로공사 출신의 오지영이나 이고은이 보호선수 명단에 빠져 있다면 데려와서 트레이드 카드로 쓰겠다는 구상만 했다. 설마 페퍼저축은행에서 이고은을 보호선수 명단에 넣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이 됐다. 4월 23일 페퍼저축은행이 보내준 보호 선수 명단에 이고은의 이름이 없었다. 즉시 코치진과 명단을 놓고 토론을 했다. 일단 이고은을 데려와서 쓰거나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봤다. 어느 구단에 연락했더니 이고은의 영입에 관심을 가졌다. 도로공사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대한항공과 도로공사가 합동으로 개최했던 우승 축하연이 열렸다. 많은 취재진이 김종민 감독에게 몰려들었다. 도로공사의 보상 선수 선택을 물었다. 김종민 감독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이고은이 명단에 빠져서 놀랐다. 선택할 생각이다”고 했다. 좁은 배구계에서 이 말은 곧 페퍼저축은행의 귀에도 들어갔다.
설마 하며 이고은을 명단에서 뺐던 페퍼저축은행은 계획대로 일이 벌어지지 않자 당황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에 조언을 구하며 해결 방법을 물었다. “도로공사에 미안하다고 하고 이고은 대신 다른 보호선수를 주는 방법”까지 얘기가 나왔다. 물론 이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미 명단을 제출해놓고 되물리는 것은 규정 위반이다. 도로공사가 들어줄 리도 없었다.
김종민 감독은 문득 6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도로공사는 IBK기업은행에서 박정아를 영입했다. 대표팀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박정아를 공항 주차장에서 만나 계약했다. 이후 보호선수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대상은 2명 이효희와 고예림이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묶느냐를 두고 김종민 감독은 고심을 거듭했다. 명단 제출 한 시간 전까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빈칸에 이효희 이름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고예림은 IBK기업은행으로 갔다. 당시 김종민 감독이 내린 선택의 근거는 이랬다.
“우리가 이효희를 보호선수 명단에 넣지 않더라도 IBK기업은행에서 데려갈 확률은 낮다. 그것은 알지만 다른 면도 생각해야 했다. 어차피 선수들은 누가 보호선수 명단에서 빠졌는지 다 안다. 그 경우 빠진 선수들이 느낄 마음의 상처도 고려해야 한다. 계속 함께할 선수인데 기분을 나쁘게 해 봐야 득이 될 것은 없다. 이런 중요한 판단일수록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당시 도로공사와 김종민 감독은 이효희를 선택했고 덕분에 사상 첫 통합우승을 차지했지만, 페퍼저축은행은 달랐다. 페퍼저축은행의 누가 이번에 보호선수 명단을 작성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선수들의 상처받을 마음까지도 고려하지 못한 외국인 감독이 내린 결정인지, 프런트의 누군가가 감독을 제쳐놓고 이런 판단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뼈아픈 패착이었다.
묘수는 결코 정석을 이기지 못한다. 도로공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26일 이고은을 지명했다. 페퍼저축은행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찾아왔다. 여론이 좋지 못했다. 팬들이 폭발했다. 지난해 영입했던 선수를 한 시즌 만에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분노했다. 이는 신뢰의 문제였다. 아차 싶었던 페퍼저축은행은 급히 수습 방법을 찾았다. 다른 구단과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세터를 내줄만한 구단이 많지 않았다. 다시 도로공사를 애타게 찾았다. 이번에도 또 성급했다. 먼저 자신의 카드를 보여줬다. 신인 지명권을 주겠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카드 게임은 없었다. 도로공사는 표정 관리를 해가며 일단 거부했다. 신인 지명을 마친 다음에나 보자고 했다.
35개의 1순위 구슬이 탐나지만, 김종민 감독은 흥국생명과의 챔피언결정전처럼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이고은을 다른 구단으로 트레이드하겠다는 말을 넌지시 흘렸다. 페퍼저축은행은 더욱 애가 달았다. 이고은은 도로공사가 지명을 발표하자 다시 김종민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저 숙소의 짐을 빼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김종민 감독은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만 대답했다.
그에 앞서서 김종민 감독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내부의 교통 정리였다. 이고은의 지명으로 가장 심리적 영향을 받을 선수는 이윤정이었다. 주전 세터의 마음부터 달래야 했다. “감독을 믿고 조금만 기다려봐”라는 문자를 보냈다. 어느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선수들의 마음부터 헤아려야 하는 V-리그 여자부 감독은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 가운데 하나다.
이 무렵 다른 구단들도 페퍼저축은행과 도로공사 사이에 재트레이드 얘기를 들었다.
간신히 시즌 6위를 하며 30개의 신인 드래프트 지명 구슬을 가진 IBK기업은행이 큰 관심을 가졌다. 아시아쿼터로 폰푼을 영입해 세터에 여유가 생긴 만큼 상대가 원하는 세터를 줄 수도 있었다. 만일 페퍼저축은행에서 1차 지명권을 받는다면 IBK기업은행은 65개의 구슬로 1,2순위 지명권을 모두 행사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IBK기업은행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러는 동안에 페퍼저축은행은 도로공사에 추가 제안을 했다.
1차 신인 지명권에 더해서 보호선수 명단에 들지 못했던 선수 1명을 더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도로공사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절친인 GS칼텍스 차상현 감독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빨리 해”라고 말했다. 느긋한 김종민 감독은 “5월 1일까지 최종 결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김종민 감독은 최종 결정을 앞두고 이고은을 불렀다. 함께 밥을 먹었다. 결정 사항을 알려줬다. “짐은 쌀 필요 없다. 페퍼저축은행에 남으면 된다. 상황은 이렇게 됐지만 마음을 다잡고 가서 열심히 하라”고 덕담도 해줬다. 그 말을 들은 이고은은 “이게 말이 됩니까. 저를 가지고 왜 그러세요”라고 했다. 표정은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5월 2일 페퍼저축은행은 이고은을 다시 영입하고 신인 1차 지명권과 최가은을 보상선수로 준다는 내용의 공식 보도자료를 돌렸다.
이고은은 우여곡절 끝에 6일 만에 원위치했다.
그는 V-리그 경력 10년 사이에 여러 팀을 옮겨 다녔다. 2013-2014시즌 1라운드 3순위로 도로공사에 입단, 2016년 IBK기업은행으로 이적했다. 전세얀 최은지-김미연 이고은을 바꾸는 2-2 트레이드에 포함됐다. 2018년에는 이나연과의 맞트레이드 상대로 GS칼텍스 유니폼을 입었다. 2020년 이원정 유서연-한송희 이고은의 2-2 트레이드 때 다시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었다. 2022년 FA 선수로 페퍼저축은행을 선택했다. 한 시즌 뒤에는 보상선수로 도로공사에 잠시 적을 뒀지만, 다시 페퍼저축은행으로 돌아갔다. 이 바람에 같은 팀 도로공사에 3번이나 오고 보상선수로 떠났다가 이전 소속팀으로 돌아가는 최초의 사례를 혼자서 만들었다.
지난 6일 동안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이고은이 페퍼저축은행에서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지는 누구도 모른다. 해프닝에 가까운 보호선수 트레이드로 페퍼저축은행은 올해 FA 시장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의 입에 팀 이름이 더 많이 올리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야말로 대성공이다. 그게 아니라면 창피한 결과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었다.
누가 뭐래도 이번 트레이드의 진정한 승자는 도로공사와 김종민 감독이다. 흥국생명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0%의 기적을 일으키며 세계적인 명장을 꺾더니 보상선수 한 명으로 신인 1차 지명권과 다른 보상선수를 데려오는 기적을 또 만들었다. 그는 대한항공 감독 시절 삼성화재에 앞서서 정지석을 지명했다. 그 선택 덕분에 대한항공은 든든한 날개를 달았다. 대한항공이 평생 무료 항공권을 줘도 될만한 공을 세웠던 김종민 감독은 이제 1차 신인 지명으로 김세빈을 잡으려고 한다. 만일 그의 구상대로만 된다면, 도로공사로부터 평생 고속도로 무료 이용권을 받을만한 공을 또 세우게 된다. 어느 감독은 이런 상황을 놓고 “전생에 나라를 몇 번 구했길래 이런 행운이 연달아 오는지 궁금하다. 올해 정말 운이 좋다”면서 부러워했다.
김종민 감독만큼이나 복을 받은 선수도 나왔다. 최가은이다. 이번 트레이드 덕분에 도로공사 선수들과 함께 우승 보너스인 미국 서부 관광 여행을 떠난다. 5월 1일부터 힘든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데 도로공사 선수들의 일정에 따르다 보니 휴가도 5월 말까지 연장됐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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