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김언혜처럼, 前 프로 배구선수의 재능기부 교실

이광준 / 기사승인 : 2018-08-23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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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체육관에는 아직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체육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김언혜(前 IBK기업은행)가 은퇴 후 대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재능기부 교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프로를 떠난 선수는 더 밝은 한국 배구의 미래를 꿈꾸며 아마추어 배구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의 곁에는 동기 최유정(前 GS칼텍스)과 후배 신해성(前 KB손해보험)이 함께했다. 프로 출신 3인방이 이화여대, 동덕여대 배구부를 만나던 7월 11일,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관을 찾았다.


배구계의 팔방미인



김언혜(26, 경북대)를 한 단어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직 프로배구 선수, 비치발리볼 선수, 코치, 스포츠 행정가를 꿈꾸는 대학생.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열정이 넘치는 ‘에너자이저’로 소문난 그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대학생을 위한 재능기부 배구교실이다.



2015년 프로에서 은퇴한 이후 비치발리볼 선수로 활약하던 김언혜는 16학번 새내기로 경북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하며 인생 2막을 맞이했다. 올해로 3학년이 되며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 비치발리볼은 잠시 내려놨다. 스위스에 있는 AISTS(Academie internationale des sciences et techniques du sport)에서 공부한 후 국제배구연맹(FIVB)에서 일하며 배구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게 그의 꿈이다. 지난 5월부터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체육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각종 연수에 참가하기 위해 매주 서울-대구를 왕복하고 있다.



스포츠 전문 행정가 수업을 들으며 김언혜는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공부한 내용을 실제 적용해보는 것이 그에겐 중요했다. 선수 출신 행정가로서 앞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겼다.



“원래는 소외계층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재능기부 교실을 하고 싶었어요. 운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좋은 취미를 만들어주고 자신감도 심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장기적으로 이런 계획을 갖고 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더 공부하고 전문성을 기른 다음에 도전하고 싶어요. 일단은 제가 익숙한 대학생들 위한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아마추어의 열정을 배우다



김언혜는 재학 중인 경북대에서도 배구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다. 아마추어 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들 덕분이다. “이 친구들이 배구를 대하는 걸 보고 처음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눈빛이 달라요. 정말 열심히 즐기면서 운동해요. 저도 배구를 업으로 삼아 이제껏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저 정도 열정이 있었던가. 저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그는 프로에서 뛰는 동기들에게도 이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평소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는 1992년생 프로 입단 동기들은 김언혜의 프로젝트를 이해하고 지지를 보냈다. 지난 수업에는 표승주(GS칼텍스)가 훈련을 도왔고, 이날은 최유정(前 GS칼텍스)이 함께 했다.



“경북대 학생들을 가르칠 때 김희진(IBK기업은행), 박정아(한국도로공사) 선수가 놀러왔어요. 운동하는 동아리 학생들을 지켜보더니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 묻는 거예요. 아마추어가 배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보다도 열정이 넘친다니까요. 생활체육 하는 분들은 선수를 롤 모델로 삼지만 그 열정은 선수들의 그것보다 큰 것 같아요. 프로 선수들이 팬들의 마음을 안다고는 해도 현장에 와보지 않으면 그 열기는 완전히 알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열의를 가지고 운동한다는 걸 선수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모습을 보면 선수들도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운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스스로를 비워내고 긍정적인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김언혜. 그는 특히 예비 체육교사들을 가르칠 때 책임감을 크게 느낀다. “체육교육과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가끔 무섭기도 해요. 이 친구들이 선생님이 되면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칠 텐데, 지금 제가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그 파급효과가 엄청날 거잖아요.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대학생으로 살아가며 대학 내 아마추어 배구의 열악한 사정을 알게 됐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전혀 지도를 받지 못하고 운동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그가 나섰다. “저도 같이 운동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아까울 게 없어요. 제가 매일 하던 것을 조금만 나누면 되는걸요. 작은 것이지만 이걸 계기로 아마추어 배구인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혼의 단짝, 최유정



김언혜의 프로젝트 소식을 듣자마자 최유정(26)은 선뜻 손길을 내밀었다. 2016~2017시즌을 끝으로 GS칼텍스에서 은퇴한 그는 실업팀 포항시체육회에서 운동을 이어가다 지난 6월 완전히 선수 생활을 접었다.



“언혜가 어릴 땐 이렇게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어요. 사실 프로 때는 시간도 없고 다른 걸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거든요.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에 가더니 보는 눈이 정말 넓어졌어요. 누구도 하지 않는 일에 겁 없이 도전하는 멋진 친구를 보며 저도 자극받죠.”



배구선수를 그만 둔 이후에도 최유정은 배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배구선수 출신 체육교사를 꿈꾸며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더 많은 분이 배구를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왔는데, 그 해답은 학교 체육이라고 봐요.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배구를 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언혜의 취지에도 공감하고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도 연관되기 때문에 재능기부 교실을 도와주고 있어요.”



그는 프로 은퇴를 고민하던 혼란한 시기에 김언혜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선수를 그만두면 나가서 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어요. 보통 사람이면 그만 두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언혜는 현실적으로 함께 고민해줬어요. 제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가도록 응원해줬죠. 가다보면 길이 있을 거라고 용기를 줬어요.”



새내기 코치, 신해성



이화여대 배구부 EAVC 코치를 맡고 있는 신해성(24) 역시 김언혜의 절친한 후배다. 지난 시즌이 끝난 후 KB손해보험에서 은퇴한 신해성은 지인의 소개로 이화여대에서 코치 일을 시작했다. 이제 갓 2개월이 된 새내기 지도자다. 코치도 처음, 여자배구도 처음인 그는 모든 게 조심스럽다. 신 코치는 전문적인 배구 지도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은사인 홍익대 박종찬 감독의 철학을 떠올리며 지도자의 역할을 다한다. 운동할 때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훈련이 끝나면 누구보다 밝게 학생들을 대한다.



“선수 생활 때도 지도자의 길은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이대 배구부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어요. 이대에선 꾸준하게 운동을 봐줄 수 있는 선수 출신 전임코치를 원했고 마침 저도 프로에서 나온 직후였거든요. 처음이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지만 열정적인 학생들의 모습에 저도 적극적으로 지도하게 됩니다.”



신해성 역시 아마추어 배구부의 에너지에 감동받았다는 말을 여러 번 이어갔다. “제가 코치를 맡은 후 대회에 두 번 나갔는데, 두 번 다 같은 팀에게 져서 우승을 놓쳤어요. 선수들이 울먹일 정도로 많이 속상해했죠. 그 열정과 승부욕에 놀랐어요. 정말 배구를 잘 하고 싶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이걸 계기로 코치인 저도 더 의욕이 생긴 것 같아요.”



라이벌의 콜라보레이션



이날 김언혜를 비롯한 코치진은 이화여대 EAVC와 동덕여대 천상 두 곳을 합동 지도했다. 아마추어 여대부에서 전통의 강호로 이름난 두 팀은 우승 전력으로 평가받을 만큼 실력이 뛰어나다.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용호상박이다. 두 팀 사이의 묘한 기류 속에 시작된 배구교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웃음이 넘쳐흘렀다. 3개의 팀으로 섞여 공을 주고받자 한결 친숙해진 모습이었다. 양 팀 선수들은 입을 모아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김언혜 코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연습에 함께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선수가 있었다. 손을 다쳐 깁스를 한 동덕여대 조영주(21) 씨다. 김언혜의 SNS에서 재능기부 교실 홍보글을 보고 팀에게 참가를 권유한 게 바로 그다. 영주씨는 열렬한 프로배구 팬인 동시에 ‘더스파이크’를 창간호부터 모두 갖고 있는 애독자였다. “배구를 좋아하게 되면서 트레이너라는 장래희망도 생겼어요. 앞으로 프로 구단에서 일하는 게 꿈이에요. 함께 훈련을 못해서 너무 아쉽지만 김언혜 선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네요.”



동덕여대 주장 이현경(22) 씨는 이 수업을 계기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제3자의 눈으로 봐야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고칠 수 있겠구나 깨달았어요. 그 동안 공격스텝을 정확히 모르고 감에만 의지했는데 이제 어떤 호흡으로 어떻게 스텝을 밟아야하는지 알게 됐어요. 코치님과 함께 하는 수업이 처음이라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런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이화여대 주장 최해랑(22) 씨는 눈높이에 맞는 수업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김언혜 코치가 프로 선수 출신임에도 아마추어 배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같아요. 아마추어의 눈높이에서 어렵지 않게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엘리트 배구와 생활체육이 함께 발전하면서 배구가 더욱 사랑받는 종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화여대에는 특별한 선수가 하나 있다. 일본 교환학생으로 이화여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츠지 유우나(22, 오사카교육대학) 씨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배구를 했다는 그는 한국 배구를 경험하고 싶어 EAVC의 문을 두드렸다.



“다음 주면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한국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이 배구를 한 거예요. 대학 진학 후엔 동아리 활동으로 농구를 했는데 역시 저에겐 배구가 제일이네요. 이걸 계기로 일본에 가서도 배구를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배구를 통해 나누는 행복



공식 연습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연습 게임을 하는 학생들을 보며 김언혜와 최유정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프로에 있을 때는 팀이 가장 먼저였어요. 저보다도 팀과 동료를 생각했고 이기는 게 최우선의 목표였죠. 그러다보니 ‘나’를 잊고 산 것 같아요.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누구보다 배구를 즐기고 사랑하게 됐어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배구를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요.”



가진 걸 나눔으로서 더 많은 걸 얻었다고 말하는 김언혜.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김언혜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한국 배구는 오늘도 한걸음 더 나아간다.



글/ 권소담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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