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보다 체육관의 공 소리가 더 듣기 좋다" 열정을 품고 떠나는 박기원 감독

김희수 / 기사승인 : 2023-04-09 16: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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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생의 나이에도 세계 각지를 누비며 배구 열정을 불태워 온 박기원 감독이 또 한 번의 도전에 나선다. 태국 남자배구 대표팀의 감독직을 맡게 된 것. 1979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이란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던 박 감독은 태국 남자배구의 수준을 올려달라는 아시아배구연맹(AVC)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Q. 먼저 태국에서 맡게 되는 직책과 역할을 간략히 설명해준다면.
남자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 태국은 성인 대표팀 감독이 청소년 대표팀까지 총괄하는 시스템이라서, 그 역할까지 모두 담당한다. 기간은 올해까지고, 계속 태국에 머무른다.

Q. 청소년 대표팀까지 총괄하는 시스템이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가.
태국에 있을 때 U-16 팀이 연습을 하고 있는 걸 봤다. 우리나라처럼 클럽하우스 같은 걸 지어서 훈련하더라. 4층에 훈련장이 두 개인데 한 쪽에는 U-16 남자, 한 쪽에는 여자 팀이 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팀은 성인 대표팀 감독이 훈련을 지도 중이었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까 성인 대표팀 감독이 원래 다 하는 거라고 하더라. 

 

정확히 무슨 훈련인지 물어보니 U-16 대표팀을 소집해서 3개월을 연습시킨 뒤 프로 팀으로 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예산은 협회가 다 댄다고 한다. 대표팀 감독의 역할이 엄청 큰 것이다. 태국 여자 대표팀이 이번에 세대교체가 잘 됐는데, 전력을 잘 유지한 것은 이런 감독의 포괄적인 역할 덕이 큰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다. 굉장히 좋게 봤다.

Q. 처음 AVC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
이전부터 AVC 코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관계자들과 태국 배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쪽에서 나에게 “여자배구는 수준이 좀 있는데 남자는 모자란다. 남자배구의 수준을 좀 올려보고 싶다.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자”고 승낙했다. 이후에 국제배구연맹(FIVB) 승인도 받았다. 배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열정이 있었는데, 그 열정을 자극해줬다.

Q. 태국행을 결정한 뒤 주변의 반응이 궁금하다.
한국 지인들과는 많은 대화를 못 나눠봤다. 몇몇 친구들이 축하해줬고, 태국에 있을 때 전화만 몇 통 받은 게 다다. 그래도 주변에서 축하한다고들 많이 이야기해준다. 이 나이에도 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기쁜 일이다.

Q. 태국 현지 반응은 어떤가.
사실 그쪽에서는 감히 나에게 감독직을 제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AVC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감독을 해주겠다고 하니 큰 힘을 느끼더라. 다들 들떠 있는 상태다.

Q. 태국 남자대표팀의 감독으로서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책임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아 배구 전반의 업그레이드라고 생각한다. 세계 수준에서는 아시아 밑에 있는 대륙이 아프리카 밖에 없다. 유럽, 아메리카를 이기지 못한다. 지금 추세라면 10~20년 후에는 세계무대에서 들러리 밖에 안 될 것이다. 걱정이 크다. 어떻게든 태국에 가서 아시아 배구를 업그레이드시킬 것이다. 세계대회에서 메달은 못 따더라도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보여줘야 한다. 

 

아시아 배구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아시아 배구가 더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많은 응원을 받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내 작은 소원이다. 이 소원을 한국이 아닌 태국에서 이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의 아쉬움도 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 면에서 실행이 안됐다. 언젠가는 잘 될 것이다.
 

Q. 태국 남자대표팀의 현재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최근 태국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리그 플레이오프 같은 경기들을 좀 보고 왔는데, 우리나라 대학리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 정도라고 본다. 우선 신체조건에서 한국 선수들보다는 벌크가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체적인 연습 부족이 문제다. 시킬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태국에 가서 선수들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건 “너희가 왜 여자대표팀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지”이다. 그리고 나는 연습 부족이라는 답변을 끌어낼 것이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확신한다.

Q. 가장 보강이 시급한 포지션은 어디인가.
거의 다다. 한 곳을 고르기가 어렵다. 미들블로커들은 속도는 괜찮은데 키가 너무 작고, 아웃사이드 히터들의 리시브도 아직 영 아니다. (AVC컵 때 아포짓 아몬텝 코난의 경기력은 돋보였는데.) 이번에 태국에 갔을 때 경기하는 걸 봤다. 나름 기술이 좋은 선수다. 공격 타이밍을 수정할 줄도 알고, 감각이 좋다. 열정적인 성격도 갖췄다(아몬텝 코난은 V-리그 남자부 아시아쿼터 트라이아웃에 지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대체돼야 할 선수다. 그 선수를 주전 아포짓으로 써서는 아시아 상위권 팀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다. 모든 포지션의 선수들을 키워야 한다. 키 크고 허우대 멀쩡한 선수들이 두세 명 정도 눈에 들어왔다. 손끝 감각이 예민한 선수들도 좀 보였다. 그러나 다들 한참 다듬어야 할 선수들이다.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순 없다. 천천히 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있는 동안에는 영광을 누리겠다, 빛을 보겠다는 생각보다는 태국 배구가 가야 할 고속도로의 입구까지만 내가 인도하겠다는 생각이다. 할 일이 정말 많지만, 할 일이 많은 것은 감독으로선 기분 좋은 일이다.

Q. 향후 일정도 궁금하다.
올해 국제대회가 굉장히 많다. SEA GAME 대회부터 시작해서 AVC컵, 챌린저컵, 아시아선수권, 아시안게임까지 치러야 한다. 여러 나라를 오가야 할 것 같다. 성적에는 큰 욕심이 없다. 물론 말로는 이래도 경기에 나가면 이기고 싶긴 하다(웃음). 그래도 현재로서는 성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Q. 아시아권 국제대회에서는 한국을 적으로 만날 가능성도 있는데.
별 생각 없다. 내가 태국 감독인 이상 태국이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예전에 이란에 감독으로 있을 때도 이란 배구협회 사람들이 나한테 한국전 똑바로 할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때도 난 지금 이란 감독이니 어떻게든 이란이 이기도록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을 이기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웃음). (지난 AVC컵 때 태국이 한국을 이기기도 했는데.) 그때는 아직 태국과 교감이 있을 때는 아니었고, 감독직 이야기가 나온 뒤 영상을 찾아서 경기를 봤다. 그 경기는 그냥 한국이 못해서 진거다(웃음).

Q. 한국에서 감독님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한 마디 부탁드린다.
늙은이의 욕심으로 태국에 간다(웃음). 난 체육관에서 공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음악 듣는 것보다 기분이 좋다. 선수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 즐겁다. 아내도 이제는 손 놓을 때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늙은이의 주책인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지도자가 하고 싶다. 돈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다. 태국에서 받는 돈은 사실상 재능기부 수준이다. 근데 이 나이에 재능 기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배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디 가서 팀 구하기도 어려운 나이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배구를 계속 할 수 있게 돼서 기쁘다. 태국에 가 있더라도 나는 항상 한국 배구를 위해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을 거다.

 

글. 김희수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DB(박상혁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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