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023시즌 KGC인삼공사의 행보는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킨다.
전혀 예측이 어려운 경기력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다. 6일 현재 11승 15패(승점35)다. 최근 4연승의 도로공사(15승 11패)와는 승점9 차이다. 5라운드에서 6세트를 내주는 동안 단 1세트도 따내지 못했다. 남은 10경기에서 대반전을 이루지 못하면 이번 시즌 농사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선수 개개인의 이름값, 구성만 놓고 보자면 결코 만족하기 힘들다.
1라운드를 3승 3패로 시작한 KGC인삼공사는 2라운드 1승 5패, 3라운드 4승 2패로 성적이 널을 뛰었다. 4라운드 초반 3연패를 기록했을 때가 고비였다. 다행히 3연승으로 한숨을 돌렸지만, 최근 2연패로 사정은 더 나빠졌다. 1월 31일 도로공사와의 5라운드 첫 경기 1세트가 뼈아팠다. 초반 무서운 기세로 16-9까지 크게 앞서간 세트를 지켜내지 못했다. 23-25로 내주면서 팀은 급격히 허물어졌다.
그날 경기는 4라운드의 반복이었다. 1월 6일 김천 원정에서 1세트를 24-19로 넉넉히 앞서다 28-30으로 역전패 당했다. 2,4세트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에 씌운 듯 24-23에서 세트를 끝내지 못했다. 만일 이번 시즌 KGC인삼공사가 봄 배구 진출에 실패한다면 두 경기 1세트의 역전패가 결정적일 것이다. 3일 흥국생명전에서도 2세트 24-22에서 27-29로 뒤집어졌다.
여자배구의 쓴맛을 혹독하게 보고 있는 고희진 감독이다. 기술보다는 여자 선수들의 심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8일 IBK기업은행과의 경기전까지 선수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다잡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번 시즌의 성패가 달려 있다. 다행히 한가지 비빌 언덕은 있다. 4라운드 초반 위기에서 고 감독은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비록 그 방법의 효능이 3연승에서 끝났지만 그래도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KGC인삼공사는 외국인 선수 엘리자벳이 압도적인 득점 부문 1위다. 국가대표 주전 세터 염혜선, V-리그 여자 선수 몸값 2위인 이소영도 있는 팀이다. 최근에는 중앙에서 정호영이 경기를 거듭할수록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반면 이상하리만큼 안정감은 떨어진다. 잘하다가도 범실을 연발하며 스스로 무너지는 경기가 많다. 게다가 팀의 장점인 중앙을 효과적으로 살리지도 못한다. 좋은 자원을 두고도 염혜선의 패스는 자주 엘리자벳에게 몰린다. 다른 공격수에게 향하는 공마저 부정확하면서 외국인 선수에게 의존하는 배구처럼 보인다. 이 바람에 고희진 감독의 지도역량까지 비난받았다. 뭔가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고희진 감독은 문제해결의 답을 세터가 아닌 아웃사이드 히터에서 찾았다.
그동안 이소영의 파트너인 한 자리는 국가대표 박혜민의 몫이었다. 아쉽게도 그는 공격과 수비, 리시브 등에서 조금씩 부족했다. 이후 그 자리를 놓고 여럿이 경쟁했다. 시즌 도중에도 주전을 정하지 못한 것에서 KGC인삼공사의 어려움은 잘 드러난다. 이선우 고의정 등 신장이 좋은 기대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도 확실했다. 상대의 서브를 잘 받아야 염혜선이 편안하게 공을 올리고 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쉽지 않았다.
고희진 감독은 고민 끝에 3라운드부터 채선아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국가대표에 차출된 노란이 부상했을 때만 해도 리베로 후보였다. 막상 시즌에 돌입하자 리베로로 출전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 최효서에게 밀리던 때도 있었다. 프로선수로 12년 차를 맞이하는 채선아로서는 자존심이 크게 상할 만도 했다. 감독이 그런 판단을 내린 근거는 있었다. 지난 3년간 선수로서 보여준 것이 거의 없었다.
채선아는 2019-2020시즌부터 3년간 19득점, 7득점, 0득점을 각각 기록했다. 1992년생으로 이제 서른 줄에 접어들었다. 채선아 스스로 “감독이 바뀌면 잘리겠구나”라면서 맞이했던 이번 시즌이었다. 그런 채선아에게 감독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했다. “지금부터 잘 준비해라. 언젠가는 쓸 기회가 올 것이다.” 만일 채선아가 이 말을 한 귀로만 듣고 흘려버렸다면 방출할 베테랑에게 해주는 마지막 립서비스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고희진 감독의 판단은 달랐다. 가능성을 봤다. “훈련 때 보니 공격과 수비에서 기량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배짱과 근성,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감독과 선수는 때론 운명 공동체가 된다. 어떤 감독은 선수의 운명도 바꾼다. 감독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선수는 팀에 필요한 보물이 될 수도, 필요 없는 존재도 된다.
IBK기업은행의 창단 멤버였던 채선아는 프로 3년째에 엄청난 경험을 했다. 당시 팀에서 리시브를 전담하던 아웃사이드 히터 윤혜숙이 갑자기 팀을 떠났다. GS칼텍스와의 2012-2013시즌 챔피언결정전 때 그를 빼고 신인 신연경으로 교체한 것이 발단이었다. 화가 난 윤혜숙은 경기 도중에 감독의 출전 지시를 거부했다. 이정철 감독도 참지 않았다. 창단 2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윤혜숙을 조건 없이 내보냈다. 이정철 감독은 윤혜숙의 뒤를 이어 리시브를 책임져줄 선수를 찾았다. 채선아가 그 역할을 맡았다.
2013-2014시즌, 2014-2015시즌 채선아는 태어나서 가장 많은 서브 폭탄을 맞았다. 2시즌 동안 각각 1192개, 1156개의 서브를 받았다. 2013-2014시즌 리시브 점유율은 무려 60.38%였다. V-리그의 역대급 리시브 점유율 기록이다. 그 시즌 모든 상대 팀이 리베로 남지연이 아닌 채선아를 향해 서브를 넣었다. 이정철 감독은 힘들어하는 채선아에게 “운명으로 알고 받아라. 그냥 모든 서브가 네게 온다고 생각해라”고 다독였다.
화양연화는 훌쩍 지나갔다. 2017-2018시즌 KGC인삼공사로 이적했다. 세월이 흘러 선수 생활의 끝이 조금씩 가까이 왔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배구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감독으로부터 “준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흘려넘길 수도 있었지만,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감독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어느 팀에서도 쉽게 찾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즌 뒤에는 FA선수 자격도 얻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서기엔 아쉬웠다. 마음을 다잡았다. 감독의 말처럼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채선아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이소영과 대각으로 서는 아웃사이드 히터로 채선아가 출전했다. 리시브와 수비에서 안정적으로 버텨주자 팀의 플레이가 한결 매끄러워졌다. 그가 아웃사이드 히터로 출전한 경기에서 KGC인삼공사는 7승을 추가했다. 그래도 타고난 키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한다. 요즘은 세트 막판 전위로 올라갈 때는 한송이가 대신해서 투입된다. 고희진 감독은 봄 배구에 올라가면 힘과 높이의 대결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채선아-한송이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고희진 감독은 “나이가 든 선수도 감독의 판단에 따라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채선아가 FA선수로 가치를 높이길 바란다”고 했다. 만일 채선아가 남은 10경기에서 안정된 리시브와 함께 간간이 중요한 공격을 성공시켜준다면 KGC인삼공사에도 희망은 있다.
사진 KO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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