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빠르게 더 촘촘히’ 2021 VNL이 보여준 트렌드

서영욱 기자 / 기사승인 : 2021-07-04 00: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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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배구연맹(FIVB) 주최 2021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가 한 달에 걸친 대장정을 마쳤다. 올해 VNL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 후 배구계도 모두 멈췄다. 지난해 국가대표팀이 출전하는 국제대회는 모두 취소됐다. VNL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FIVB는 올해 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코로나19 상황에 맞춰 ‘버블 라운드’로 치러진 건 눈에 띄는 부분이다. 또한 이번 대회는 같은 이유로 1년 연기된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최종 모의고사 성격이 강했다. 여기에 최근 국제배구 흐름을 볼 수 있는 무대가 됐다.
 


스피드에는 경계 없다

“정말 빨라졌네요.” 2021 VNL에 참가한 한국 여자배구대표팀 경기 중계방송에서 해설을 맡은 이숙자 KBSN스포츠 배구해설위원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국이 VNL에서 상대한 15개 팀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스피드’다. 단순히 세터가 미들블로커, 아포짓 스파이커, 윙스파이커에게 보내는 패스 스피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위원은 “포지션별 그리고 코트 안에 있는 선수들의 플레이 자체가 많이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도 V-리그 현대건설, GS칼텍스 그리고 태극 마크를 달고 수많은 국제대회를 뛴 세터 출신이다. 그는 VNL의 전신인 월드그랑프리에도 많은 경기에 뛰었다.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 지 이제는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해설위원으로 V-리그를 비롯해 국제대회를 지켜본 경험이 있다. 이 위원은 “2019년 월드컵 때와 비교해도 플레이가 좀 더 빨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국제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각국 리그는 진행됐지만 국제대회가 없다보니 각국 대표팀의 트렌드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2021 VNL은 의미가 있는 자리가 됐다.

이 위원이 꼽는 또 하나의 변화는 남녀배구 특성이 예전과 비교해 차이점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V-리그도 그렇지만 남자배구 경기에서 자주 나오던 파이프(중앙 후위 시간차) 공격이 대표적이다. 여자배구에서도 이제는 낯설거나 생경한 장면이 아니다. 여기에 전원 공격 전원 수비 개념까지 더해졌다.

포지션별로 갖고 있는 특성이 두드러지기보다는 멀티 포지션 능력이 코트 안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요구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아포짓 스파이커는 리시브를 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 및 응용될 수 있다. V-리그 현장 지도자들도 이런 부분을 알고 있다.

신영철 우리카드 감독과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은 “브라질 남자배구대표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싱크로 공격이 더 빠르게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싱크로 공격은 제법 역사가 오래됐다. 이제는 새로운 공격 전개 방법은 아니다.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참가한 브라질 남자대표팀이 처음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전술을 개발해낸 주인공은 제 호베르투 감독이다. 국내 배구팬에게도 낯익은 인물로 김연경이 페네르바체(터키)에 처음 입단할 당시 사령탑이었다. 그는 브라질 남녀배구대표팀 감독을 거치며 싱크로 공격을 더 가다듬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 호베르투에 이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헤젠지 감독은 이를 잘 계승했고 브라질이 오랜 기간 세계 최강 자리를 지키는데 바탕이 됐다.

최 감독과 신 감독은 “이번 VNL 여자부 경기에서도 그런 공격(싱크로)과 유사한 방법으로 플레이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였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상대 블로커를 따돌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플레이 스피드가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숙자 위원과 두 감독은 공통점이 있다. 선수 시절 모두 같은 포지션인 세터로 뛰었다. 팀 공격을 세팅하고 플레이를 전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가 치러지는 도중 스피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VNL ‘에이스’ 올림픽에선 못봐

VNL 예선 라운드 1~5주차 일정을 기준으로 올해 VNL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주인공은 남자부는 니미르 압델-아지즈(네덜란드), 여자부는 브릿 헤르보츠(벨기에)다.

압델-아지즈는 264점을, 헤르보츠는 337점을 각각 올렸다. 공격에서만큼은 두 선수가 올해 VNL을 대표하는 ‘에이스’가 됐다. 그런데 두 선수를 도쿄 올림픽에서는 볼 수 없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유럽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도쿄올림픽 남자부는 개최국 일본을 비롯해 폴란드, 이탈리아, 캐나다, 이란, 베네수엘라가 A조에 속했다. 브라질, 미국, 러시아, 아르헨티나, 프랑스, 튀니지가 B조다. VNL 남자부에서는 브라질과 폴란드가 1~5주차 일정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두 팀은 각각 1, 2위에 올랐다.

그런데 예상외 팀이 선전했다. 역시나 도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 슬로베니아다. 슬로베니아는 미국, 러시아, 세르비아, 프랑스, 이탈리아를 모두 제치고 브라질과 폴란드에 이어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클레멘 세불과 티네 우르나우트를 쌍포로 앞세운 슬로베니아는 화력 맞대결에서 밀리지 않았다. 톤첵 슈테른까지 공격 삼각편대가 제몫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슈테른은 V-리그 트라이아웃에 참가 신청서를 낸 경력이 있다. 그러나 V-리그 남자부 7개 팀 사령탑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폴란드는 VNL을 통해 도쿄올림픽에서 충분히 금메달을 노려볼 만한 팀으로 떠올랐다. 예선 라운드 득점 순위 상위권에 이르을 올린 선수가 없음에도 예선 라운드 2위, 파이널 라운드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폴란드가 엔트리에 오른 선수들을 고르게 기용했고 VNL에 참가한 팀들 대부분이 100% 완벽한 전력을 구성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떠나 폴란드는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는 지난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5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장을 냈다.

폴란드에선 카밀 세메니우크 외에 쿠바 출신 귀화 선수인 윌프레도 레온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2019년 유럽선수권을 통해 폴란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에 첫선을 보인 레온(그 이전에는 쿠바대표팀으로 뛰었다)은 현재 국제배구계에서 최고의 윙스파이커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번 대회가 올림픽 무대 데뷔전이 된다. 최태웅 감독은 “폴란드 대표팀에서 레온이 코트에 있고 없고 차이가 분명히 있다”며 “개인적으로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관심이 가는 팀이 폴란드”라고 언급했다.

여자부는 VNL 1~5주차 일정만 놓고 보면 미국과 브라질이 2016 리우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중국의 벽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이번 VNL에서 1~3라운드까지는 2진급 멤버로 뛰었다. ‘에이스’ 주팅을 포함한 베스트 멤버 가동은 4주차 이후부터였다.

VNL로만 범위를 좁히면 미국의 탄탄한 조직력이 눈에 띈다. 브라질도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냈다. 도쿄올림픽에서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한국은 A조에 속해 개최국 일본을 비롯해 브라질, 세르비아, 도미니카공화국, 케냐와 함께 묶였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터키, 아르헨티나가 속한 B조보다 조별리그가 좀 더 수월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지만 만만한 팀이 별로 없다. 세르비아는 VNL에서 한국에 두 계단 앞선 13위에 그쳤지만 이번 대회에 대표팀 주전 멤버 대부분이 나오지 않았다. 6위를 차지한 도미니카공화국도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높이와 공격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배구, 높이를 넘었다

도쿄올림픽 개최국 일본은 VNL에서 기대 이상 소득을 얻었다. 여자는 3위, 남자는 8위에 각각 올랐다. 남자대표팀은 2019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는 깜짝 성적을 냈다. 이번 VNL에서도 실력을 증명하며 월드컵에서 거둔 성적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일본은 남녀대표팀 모두 평균 신장이 VNL 참가국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상대팀 높이를 훌쩍 뛰어 넘었다. 좋은 성적을 이끈 원동력은 일본배구를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인 탄탄한 조직력과 수비, 그리고 리시브가 꼽힌다. 남자팀의 경우는 ‘에이스’ 이시카와 유키를 앞세워 오랜 기간 대표팀 주전 아포짓 스파이커로 활약하고 있는 시미즈 쿠니히로, 단신 아포짓 스파이커 겸 윙스파이커인 다카하시 란의 공격 삼각편대가 국제무대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신영철 감독은 “우리 팀도 그렇지만 한국배구가 현 상황에서 추구해야 하는 배구를 일본 대표팀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키가 작은 선수들이지만 상대 블로킹을 잘 피하거나 이를 이용해 활용하는 공격을 보면 대단하다”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양쪽 공격수들의 빠른 플레이라고 본다. 그리고 당연히 기본기라 할 수 있는 수비와 리시브”라고 말했다. 우리카드 선수들은 VNL에서 일본이 치른 경기를 오프시즌 들어 영상 참고서로 활용하고 있다. 전력분석관을 겸하고 있는 김재현 수석코치가 일본 경기를 재가공해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표_2021 VNL여자부 국가별 공격 효율, 디그 성공률, 리시브 효율, 블로킹 효율


여자팀은 수비의 힘이 돋보였다. 일본 여자대표팀은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당시 선수들을 주축으로 일본은 201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가 성인대표팀에서도 자리를 잘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일본은 VNL 블로킹 득실률 부문에서 16개 참가국 중에서 0.628로 15위(한국은 14위에 올랐다)에 머물렀다(표 참조). 그러나 일본은 리시브 효율에서는 16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유일하게 리시브 효율이 40%를 넘은 팀이다. 디그 성공률도 4위를 기록했다. 두 부문에서 높은 지표가 발판이 돼 공격효율 부문에서도 7위라는 준수한 수치를 기록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176cm)보다 평균 신장에서 6cm가 더 큰 한국은 공격효율 부문 14위로 처졌다. 일본의 경우 리시브와 수비가 바탕이 돼 공격 효율을 끌어올린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신영철 감독은 “리베로 제도가 생긴 뒤 유럽배구를 공략할 틈이 더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유럽팀들의 경우 수비와 조직력에서 약점이 분명했다”면서 “그러나 리베로가 도입된 뒤 그런 점이 많이 개선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팀들이 리베로 도입 초창기부터 어느 시점까지 도움이 된 점도 분명히 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리베로 자리가 미들블로커와 함께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들블로커의 경우는 여자부 경기에서 활용폭이 더 늘어났다. ‘라바리니호’에서 미들블로커로 이번 VNL을 뛴 한송이(KGC인삼공사)는 “예전 올림픽과 월드그랑프리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미들블로커의 플레이 가담이 늘어났다”며 “활용법이나 빈도 수도 마찬가지라고 느꼈다”고 얘기했다.

*기록 정리와 그래프를 작성한 동아일보 황규인 기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글. 류한준 조이뉴스24 기자
사진. FIVB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7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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