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 도전국 자격으로 참가한 한국남자배구 대표팀은 15전 1승 14패로 대회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VNL 잔류에 실패했다. 14패 가운데 아홉 번이나 무기력한 0-3 패배를 당했기에 대표팀을 향한 비판 강도는 셌다. 세계의 높은 벽에 부딪힌 김호철 감독과 선수들이 느낀 좌절감도 컸다. 김연경을 필두로 한 여자대표팀이 세계랭킹 1위 중국을 꺾은 데 이어 수원에서 치른 3차례의 예선 중 러시아, 독일 등 유럽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과도 비교당하며 쓴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이후로 줄곧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남자대표팀은 세계배구의 흐름과 동떨어져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아시아 강호라는 수식어도 이제는 옛 말이 된지 오래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두 번의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동메달에 그치며 남자대표팀의 금맥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김호철 감독도, 그와 함께하는 14인의 선수들도 모두 ‘마지막’이라는 절실함으로 뭉쳤다. 김호철호는 이번 아시안게임이 한국남자배구의 희망을 이어갈 시발점이 되길 바라며 이를 악물고 고된 훈련을 소화했다.
남자배구,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지난 6월 26일 VNL 5주차 테헤란 시리즈를 마친 후 귀국한 남자대표팀의 표정은 침울함 그 자체였다.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던 건 5주간 대륙을 넘나드는 살인적인 일정보다 세계의 벽 앞에 한없이 무력했던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좌절감에만 빠져있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있기 때문이다. 김호철 감독은 귀국 직후 “아시안게임에는 실력과 컨디션이 모두 좋은 선수들로 구성하려고 한다”라고 굳은 의지를 다지며 대표팀을 잠시 해산했다.
7월 8일,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최종 14인이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모여 아시안게임 준비 체제에 돌입했다. 아시안게임 엔트리에는 VNL을 소화했던 11명에다 한선수(33, 대한항공), 최민호(30, 현대캐피탈), 부용찬(29, OK저축은행)이 새롭게 합류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최민호가 군인 신분으로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최민호는 상근예비역으로 군복무를 하면서도 꾸준한 웨이트 훈련으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최민호는 “(한)선수 형이나 이민규는 예전부터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올라오진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 끌어올린다면 경기를 하면서 잘 맞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남자대표팀이 VNL에서 힘든 싸움을 치르는 동안 가장 많이 지적된 부분은 중앙 약점이었다. 최민호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신)영석(32, 현대캐피탈)이 형이 함께 왔으면 부담이 덜했을 텐데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 지금 대표팀 미들블로커 중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라고 털어놨다.
남자대표팀을 향한 따가운 시선도 이미 예상했던 바다. 최민호는 “선수라면 당연히 성적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좋은 결과를 보여드린다면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겨내야 할 몫이다”라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오랜 시간 배구공을 내려놓았던 최민호는 선수단 훈련이 모두 끝난 뒤에도 블로킹, 속공 등 개인 훈련을 이어갔다.
지난 4월 대표팀 첫 소집부터 함께했던 선수들이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은 말할 것도 없이 무거웠다. 정민수(27, KB손해보험)는 “VNL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 높이 보다도 우리의 수비나 리시브에서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다. 지금은 세계배구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며 VNL을 통해 느낀 점을 전했다.
남자대표팀이 VNL에서 만나게 될 이란, 일본, 중국 등은 이미 VNL에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이란은 아시아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체격 조건을, 일본은 빠른 스피드를, 중국은 높이를 무기로 장착해 한국과 대결했다. 이에 정민수는 “상대의 스타일을 신경쓰기 보다 우리의 배구를 만드는 게 먼저다. VNL을 하면서 다른 나라들은 서로 호흡이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선수들 간 호흡에서 부족한 점을 느꼈다”라며 “상대를 분석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더욱 탄탄히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2017~2018시즌 챔피언결정전까지 치른 후 곧바로 대표팀에 소집돼 고된 훈련을 이어오고 있는 정지석(23, 대한항공)은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힘들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라면서도 “남자대표팀이 바꿔나가야 할 점들이 많아 훈련해야 할 것이 많다”라며 묵묵히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정지석은 대표팀에 새롭게 합류한 한선수에게 강한 신뢰를 보였다. 그는 “(한)선수 형은 아직도 한국 세터 중에 최고다. 3년 내내 최고연봉을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라고 치켜세웠다.
한선수는 남자대표팀에 천군만마와도 같은 존재다. 정지석은 “VNL을 치르면서 남자배구의 현실이 위태롭다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형들이 우리를 이끌어줬다면 앞으로는 나와 (나)경복이 형, (황)택의가 책임지고 이어받아야 한다”라며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며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VNL에서 눈도장을 찍은 나경복은 가장 늦게 아시안게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신영석이 수술 후 회복이 더뎌 대표팀 합류가 불투명해지자 김호철 감독은 나경복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다시 대표팀으로 불러들였다.
나경복은 “감독님께서 나를 믿고 다시 불러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대표팀에 들어온 만큼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 밖에는 없다”라며 합류한 소감을 밝혔다. 198cm라는 좋은 신체 조건을 지닌 나경복은 이탈리아, 이란 등 강팀과 맞대결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AG은 한국남자배구 살릴 마지막 기회
김호철 감독이 3주간의 VNL 해외 원정을 마친 후 서울시리즈를 치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 국제무대에 번번이 낙방해 세계 강호들과 실력을 겨루지 못했던 남자대표팀은 유럽, 북미 국가들과 경기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같은 아시아권 나라인 이란, 일본과도 힘든 싸움을 이어갔다. 기대 이하의 경기에 남자배구를 응원하던 팬들도 서서히 등을 돌렸다.
이에 김호철 감독과 남자대표팀은 아시안게임을 한국남자배구를 살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아시안게임에 모든 힘과 노력을 쏟고 있다.
김호철 감독은 “VNL을 하면서 한국배구와 세계배구의 차이를 많이 느꼈다.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도 처음엔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그래도 선수들이 경기에 적응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생각한다”라며 짧은 소회를 밝혔다. 이어 “VNL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해야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다. 지금은 서브와 서브리시브에 80% 비중을 두고 훈련하고 있다. 선수들도 열심히 훈련에 동참하고 있다. 2~3개월 안에 모든 것을 고칠 수는 없지만 필요한 부분을 조금씩 수정해나가고 있다”라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을 밝혔다.
김호철 감독이 VNL을 통해 느낀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경기력이다. 김호철 감독은 “기복이 심할 때는 감독이 손을 못 댈 정도로 무너지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1년 내내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한다면 차근차근 고치겠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단기간에 문제점을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선수도, 감독도 힘들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호철 감독은 대표팀 훈련이 재개된 이후 군복무 중 대표팀에 소집된 최민호의 경기 감각을 되찾는 데 열을 올렸다. 김 감독은 “최민호가 군복무로 인해 배구를 하지 못하면서 볼 감각이나 스피드, 순발력이 떨어져 있다. 그래도 김재휘와 김규민이 VNL을 통해 많이 성장했기 때문에 미들 블로커 선수들을 믿는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조금씩 맞춰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라고 예상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서브 범실이다. 김호철 감독은 “선수들이 아직 자신의 서브에 100% 확신이 없다. 강하게는 때리지만 정확성이 떨어진다”라며 “서브 범실을 줄일 수 있도록 목적타 서브 연습도 적절히 하고 있다. 모든 선수들이 두 가지 종류 이상의 서브를 구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라며 대표팀의 훈련 방향을 설명했다.
김호철 감독에 따르면, 세계배구의 흐름은 강한 스파이크 서브에서 플로팅 서브로 서서히 바뀌고 있다고 한다. 김 감독은 “플로팅 서브의 속도가 시속 80km 이상이면 리시브하기 굉장히 힘들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아직 60km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느린 공은 상대가 받기 쉽기 때문에 상대가 받기 힘든 서브를 넣어야 한다”라며 “강타는 아니더라도 상대가 받기 까다로워하는 자리에 서브를 넣어야 한다. 10개를 넣으면 9개는 들어갈 수 있도록 정확도도 높여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목적타 서브가 익숙해지면 서브 범실이 줄어들 수 있고, 그만큼 스파이크 서브를 넣을 때 더욱 자신감 있게 때릴 수 있다. 선수들이 다양한 스타일의 서브를 구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매일 서브 훈련을 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선택과 집중: 이란·일본·중국전에 올인
아시안게임은 강팀과 약팀의 구분이 뚜렷하다. 김호철 감독은 중요한 경기에 전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김 감독은 “아시안게임에서는 두세 경기가 중요하다. 그날 선수들 컨디션을 확인해보고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는 선수들로 경기를 치를 생각이다. 이란, 일본, 중국과 경기에 베스트 멤버를 넣으려고 한다”라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구상을 밝혔다.
김호철 감독이 가장 경계하는 팀은 이란이다. 김 감독은 “이란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식 배구를 하고 있다. 이미 서로에 대한 분석은 끝난 지 오래다. 중요한 건 우리가 준비한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잘 하느냐다. 상대방이 잘해서 점수를 올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범실로 점수를 내줘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경기에서도 결코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최근 카타르, 카자흐스탄 등 배구 변방 지역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김 감독은 “그쪽 나라들이 귀화 선수들로 대표팀을 구성해 전력이 좋아지고 있다”라며 “예전에는 한국이라고 하면 그들이 넘볼 수 없는 강팀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우리를 보며 ‘해볼 만 하다’라고 느끼는 것 같다. 그만큼 한국남자배구가 침체기에 빠져있다”라고 걱정했다.
올해 남자대표팀의 첫 소집 시기는 4월 중순이었다. 그마저도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 등을 치른 선수들은 5월 초가 돼서야 진천선수촌에 합류했다. 김호철 감독은 “VNL에서 만났던 외국 지도자들이 다른 나라는 시즌이 끝난 직후부터 세계대회 준비에 들어갔다고 했다. 우리는 소집이 너무 늦었다. 대회를 준비하는 데 거의 3주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아직은 대표팀보다 프로팀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대표팀의 비중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배구 최초로 전임감독을 맡은 김호철 감독의 머릿속에는 아시안게임 후 구상도 어느 정도 그려져 있었다. 김 감독은 “4월에 선수들을 처음 소집했을 때 유망주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었다. 올 겨울에도 유망주 시스템을 다시 해볼 생각이다. 대한민국배구협회와 논의 중에 있는 사안이지만, 시간이 된다면 12월, 1월에 대학생들과 고교생 선수들을 소집해 집중 훈련을 해볼 생각이다”라고 귀띔했다. 김 감독은 “지금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들 중 절반 정도는 내년에 열리는 올림픽 예선전에서도 활약을 해줘야 하는 선수들이다. 나머지 절반은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미리 대비시켜 채우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더 이상 남자대표팀에게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는 통하지 않는다. 무조건 이겨야 하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김호철 감독은 선수들이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배구를 즐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김 감독은 “아시안게임에 나간다고 해서 금메달이 보장된 건 아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선수들이 더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선수들이 조금 더 밝은 분위기로 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적에 대한 압박감을 조금 내려놓고 정말 배구가 하고 싶어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라며 조심스레 말했다.
김호철 감독은 “선수들이 각자 소속팀에서 나와 대표팀에서 힘든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한국남자배구를 응원하는 팬들도 선수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응원해주셨으면 한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글/ 이현지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유용우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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