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터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어찌 보면 모순적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늘 뜨거운 승부욕을 발휘해야 하지만, 코트 안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 경기를 운영해야 하기도 한다. 이것이 세터가 배구 코트를 채우는 5개의 포지션 중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배구는 세터놀음’이라는 말은 이미 정설처럼 굳어졌다. 지금 여기, 모두에게 인정받는 세터가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가 있다. 183cm의 키로 누구보다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도움닫기를 하는 이승호(22)다.
마지막 남은 기회
이승호는 경희대 입학과 동시에 주전 세터 자리를 꿰찼다. 그는 이미 대학무대에서 결승전만도 4차례 치렀다. 하지만 결과는 늘 2위였다. 그는 “3위보다 못한 2위”같다며 마지막 우승 기회인 2018 대학리그 플레이오프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학생으로서 마지막 리그를 치르는 이승호는 그 어느 때보다 우승을 간절하게 원했다. 그는 “초, 중, 고등학생 때는 다 우승을 해봤는데 아직 대학에서는 한 번도 우승을 못 했어요”라며 “5월에 있었던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긴 했었는데 출전한 학교가 네 개 뿐이어서 반쪽짜리 우승이었거든요”라고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경희대는 지난 7월 폐막한 2018 ㈜동양환경배 전국대학배구 청양대회(이하 청양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랐지만 한양대에 무릎을 꿇고 우승컵을 눈앞에서 놓쳤다. 이승호는 “지금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할까’보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졌던 경기들을 돌아보면서 왜 졌는지 진단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나가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경희대가 자체 진단한 약점은 ‘서브’와 ‘서브리시브’. 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플레이다. 이승호는 “청양대회 결승전에서는 우리 리시브가 안 되니까 공격도 불안하고, 공격수들의 공격성공률도 떨어지더라고요”라며 “서브와 서브리시브를 가장 중점적으로 연습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효블로킹으로 공을 잡은 이후에 수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 같이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서브리시브와 수비를 주로 담당하는 윙스파이커, 리베로의 역할이다. 세터 이승호는 어떤 점을 보완하고 있을까. 그는 “리시브가 완벽하면 아무나 세터 할 수 있어요. 리시브가 흔들리더라도 공격수들에게 공을 제대로 연결해주는 게 세터의 역할이잖아요”라며 “경기할 때 후배들이 리시브를 힘들어할 때마다 일단 저한테 넘기라고 말해요. ‘내가 잡아줄 테니까 자신 있게 넘겨’라고요”라고 리더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어 “공격수들한테는 ‘내가 블로킹 하나 빼줄 테니까 자신 있게 때려’라고 말하죠. 동료들 사기를 올려주려고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서 당당하고 믿음직한 선배의 면모가 드러났다.
어느덧 4학년이 된 이승호는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기를 할 때 1, 2학년 동생들이 바짝 긴장해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늘 동생들한테 패기 있게 뛰라고 말해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도 상대한테는 그런 모습 보이지 말라고요.”
이제 이승호가 경희대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는 경기는 열 번도 채 남지 않았다. 그는 “마무리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제 몇 경기 안 남았으니까 더 분발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걸 정리하는 느낌으로 하고 싶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을 거예요”라고 다짐했다.
내가 선택한 길, 세터
세터는 수비와 공격을 이어주는 연결다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공격수에 비해 비교적 신장이라는 조건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현대 배구에선 타점이 높은 외국인 공격수가 들어오고, 스피드 배구가 주를 이루며 세터에게도 보다 효율적인 블로킹 능력을 요구하게 됐다. 세터 역시 키가 클수록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승호는 183cm로 배구선수로서 상당히 키가 작은 편이다. 경기대 세터 김명관(196cm), 성균관대 세터 이원중(188cm), 한양대 세터 최진성(188cm)과 비교하면 신장 열세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이승호 역시 “가장 아쉬운 건 작은 키”라면서도 “블로킹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는다”라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대학리그 전반기 블로킹 성적을 보면 이승호는 대학리그 전반기 아홉 경기에서 블로킹 10득점, 유효블로킹 15개로 이원중(블로킹 4득점, 유효블로킹 6개), 최진성(블로킹 8득점, 유효블로킹 5개)보다 뛰어난 블로킹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블로킹은 자신 있었어요”라며 “남들보다 키는 작아도 점프력이 좋거든요. 블로킹 기록이 말해주고 있잖아요”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150cm를 넘지 못한 이승호였다. 그런 그가 처음 맡은 포지션은 아포짓 스파이커. 초등학교의 경우 포지션의 경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공격수로 시작했다. 6학년이 되어서야 세터라는 포지션을 시작한 이승호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쭉 세터로 성장하고 있다.
중간에 고비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팀에 공격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포짓 스파이커를 맡아야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는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버텼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불만이 엄청 많았어요. 저는 세터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대학도 가야하고 제 키로는 절대 공격수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대학에 와서 다시 제자리를 찾은 이승호는 처음에 헤매기도 정말 많이 헤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승호가 대학 진학과 동시에 주전 세터를 꿰찰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중학교 시절 은사님인 임영일 코치(현 속초고 코치)의 얘기를 꺼냈다.
“심적으로 힘들었던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몸이 힘들었던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세터인데 공을 제대로 못 올렸거든요. 당시에 팀에 세터가 저밖에 없어서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세트를 해야 했어요. 코치님께 매일 혼나면서 배웠는데 그 때가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분이죠.”
이승호가 졸업한 속초고는 신장이 작지만 빠른 스피드가 자랑인 팀이다. 그는 “속초고 선수들이 대부분 키가 작은데도 매년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보면 임영일 코치님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코치님은 키를 극복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시는 분이에요”라며 “지금도 종종 연락드리고 휴가 때 찾아뵙기도 해요”라고 끈끈한 사이를 과시했다.
세터로서 이승호를 성장시킨 게 코치님이라면, 운동선수로서 이승호를 성장시킨 건 그의 누나였다. 삼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이승호는 발레리나 출신인 작은 누나와 8살 차이가 난다. 발레를 전공한 작은 누나는 이승호를 만날 때마다 몸의 밸런스를 확인해주고, 어떤 운동을 하는 게 좋을지 추천해주기도 한다.
이승호는 누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힘든 일이 있을 땐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상담을 한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 오고 나서 슬럼프를 겪는 것 같았어요. 세터를 1년 쉬고 다시 하게 된 거라 힘들기도 했고 ‘여기까지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힘들 때마다 작은 누나한테 전화해서 투정도 부리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기도 했어요”라고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평소엔 한없이 자상한 누나지만, 필요할 땐 따끔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 누나였다. “작은 누나가 저한테 ‘너 얼마나 노력해봤는데? 안 되는 만큼 개인 운동 해봤어?’라며 한 마디 하더라고요. 그 때 정신이 바짝 들었어요. 그 전까지는 할 땐 하고 쉴 때는 쉬자는 마인드였는데 누나 얘기를 듣고 나니까 그동안 제가 너무 안일하게 했던 것 같더라고요. 반성 많이 했어요.”
작은 누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그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다. 그는 “어머니나 누나나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라며 “그냥 살짝 다친 건데도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니까 피곤할 정도에요(웃음)”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작은 누나의 조언을 들은 후로 더 열심히 운동에 매진한 이승호는 점차 그 실력을 인정받는 세터가 되었다. 이승호가 생각하는 세터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터라면 냉정하게 팀을 운영해야 해요. 우리 팀 공격수가 각각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를 다 파악할 줄도 알아야 하고요”라며 “배구가 신체 접촉이 없는 신사적인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네트를 사이에 두고 기 싸움이 엄청 치열하거든요. 후배들이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아주는 게 세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자신만의 생각을 얘기했다.
이승호는 “사실 제가 승부욕이 강해서 경기할 때 흥분하기도 하는데,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성격으로는 공격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해요. 침착하게 하는 것 보다는 파이팅 있게 뛰어다니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승호의 말대로, 배구는 분위기 싸움이다. 팽팽한 접전 속에서 누가 분위기를 먼저 가져가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경기가 많다. 이승호는 “승부가 박빙일 때는 ‘블로킹 하나만 잡자’라는 생각으로 공을 올려요. 제가 상대 블로커의 발을 묶어서 우리 득점에 성공하면 더 파이팅 넘치게 뛰어다니죠”라면서도 “그리고나서 다시 랠리가 시작되면 차분하게 경기를 운영하려고 노력해요”라며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설명했다.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지금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이 첫 번째 결실을 맺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바로 2018~2019시즌 신인 드래프트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날만을 위해 힘든 운동을 버텨왔다. 드래프트를 앞둔 이승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까지도 늘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제가 목표로 설정한 것을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거든요”라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승호가 차분하게 드래프트를 앞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그는 “종종 제가 프로팀에서 뛰는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상상은 자유잖아요”라며 “불안함이나 걱정은 미뤄두고 꼭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운동에 매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세계적인 권투 선수인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메이웨더)’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이승호는 “메이워더는 경기를 앞두고 계체량 측정을 할 때 늘 상대방을 약올리는 말을 하더라고요. ‘너는 나한테 안돼’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나서는 엄청나게 운동을 한대요.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요. 저도 메이웨더처럼 뒤에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꼭 제가 목표로 한 것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다짐했다.
이승호가 꿈꾸는 ‘프로선수 이승호’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배구선수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이 저를 보고 키가 작아도 배구선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라는 의젓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프로에 가서 지금까지 배구를 해왔던 시간보다 더 오래 배구를 하고 싶어요. 키가 작아서 계속 배구를 해도 될지 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제가 프로에서도 살아남는 모습을 보고 배구선수로서의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 꿈이에요”라고 웃어보였다.
프로 진출을 앞둔 이승호는 “프로팀에 입단하고 나면 진짜 제 직업이 배구선수가 되는 거니까 느낌이 새로울 것 같기도 해요”라며 설레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어 “프로팀 경기는 많은 분들이 경기장에 찾아와주시기도 하고 TV로 중계되는 것도 너무 신기할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이승호가 종종 프로에 먼저 진출한 친구, 선배들을 만나면 늘 듣는 말이 있다고 한다. “몇 번째로 뽑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라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는 “배구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스포츠잖아요. 축구나 농구는 혼자서도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배구는 공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뿐이니까 다 함께 힘을 합쳐야 해요. 그게 배구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함께 하게 될 동료들과 늘 즐겁게 배구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며 새로운 유니폼을 입게 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글/ 이현지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9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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