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카락을 여러갈래로 땋아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과 화려한 문신. 그는 한국무대에 등장할 때 외모 하나만으로도 이미 눈길을 끌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난 9월 천안넵스컵에서 선보인 기량 또한 뛰어났다. 펠리페 안톤 반데로(등록명 펠리페)는 그렇게 화제를 몰고 다녔다. 펠리페는 이제 외모만이 아니라 배구선수로서 출중한 실력을 통해 본인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실력과 함께 성실함과 배려심도 갖춘 펠리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더스파이크>가 나섰다. 지난 10월 23일, 수원 홈 개막전을 앞두고 열리는 팬 사인회 준비에 한창이던 펠리페를 만났다.
컵 대회 MVP, 이보다 좋은 시작은 없다
외모만큼 강렬한 데뷔 무대였다. 펠리페는 지난 9월 열린 ‘2017 천안 넵스컵 프로배구대회(이하 컵 대회)’에서 만점 활약을 선보이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 9월 23일 우리카드와 결승전, 그는 30득점(블로킹 1개, 서브에이스 6개 포함)을 기록, 양 팀 선수들 가운데 단연 돋보였다. 큰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보인 결정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경기 MVP에 펠리페가 선정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펠리페는 트라이아웃 당시 낮은 우선순위로 별다른 주목을 받진 못했다. 김철수 감독이 펠리페를 선택할 때만 해도 주위에서 수많은 의문을 제시했던 건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펠리페의 강렬한 데뷔전은 주변의 의문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Q. 컵 대회에서 우승했다. 늦었지만 그 소감이 궁금하다.
한국에 첫 선 보이는 무대인만큼 내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 뿌듯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실전에서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다. 다행히 연습한 것처럼 잘 나온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Q. 우승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합류했던 8월부터 힘든 훈련을 꾸준히 소화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특히 매 순간 함께했던 팀원들이 있어 우승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하나 되어 경기를 치러 이길 수 있었다.
Q. 첫 무대에서 MVP도 수상했다. 기분이 남다를 것 같은데.
팀 우승과 함께 MVP도 수상하게 돼 단연 기뻤다. 내가 한 것을 인정받은 것이어서 MVP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혼자 했다면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팀원들과 함께 했던 덕분에 MVP를 수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혼자였다면 이 상 역시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팀원들에게 고맙다.
본격적인 리그 돌입, 꿈의 무대로
펠리페는 지난 8월 인터뷰에서 ‘꿈의 무대,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9월 천안넵스컵 대회를 지나 10월 14일, V-리그 무대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에게 한국리그를 경험한 느낌이 어떤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Q.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됐다. 컵 대회 시작과는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컵 대회는 단기전이다. 짧은 시간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한다. 반면 시즌은 장기전이다. 긴 일정 내내 집중력이 필요하다. 또한 결국 본 무대는 시즌이다. 본 무대가 아무래도 더 긴장되는 건 사실이다.
Q. 17일, 시즌 첫 경기(vs OK저축은행)에서 5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늘 처음은 긴장되기 마련이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랬지만 선수들, 감독님 모두 그런 것 같았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던 경기를 패해 아쉬움이 컸다. 지난 일이기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진 않다(웃음).
Q. 이후 두 번째 경기(vs KB손해보험)에서는 확실히 나은 모습이었다.
긴장이 풀렸으니까(웃음). 패배 이후 선수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좋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고치려 노력했다. 두 번째 경기서 만난 KB손해보험은 서브가 굉장히 좋았다. 우리 역시 공격적인 서브로 맞대응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Q. 그 경기에서 손을 들고 잘못을 인정하는 장면이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별 것 아니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경기 끝나고 앞으로 이런 실수 없도록 하자고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내가 한국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곤 ‘한국전력’ 뿐이다. 한국전력은 한국에서 내게 가족과 다름없다. 가족끼리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서로 부족한 점을 채우는 건 당연하다.
고마운 여자친구, 그리고 가족
Q. 배구를 처음 시작한 건 언제였나.
열한 살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집안에서 굉장히 말썽꾸러기였다.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걱정하셨다. 어릴 때부터 넘치는 에너지를 가져서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빨리 다른 것에 에너지를 쏟길 바랐다. 그러던 중 친형이 배구하는 모습을 봤다. 그 당시 형은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들블로커였는데 공격도 굉장히 잘했다. 그 모습이 정말 멋졌다. 그 이후로 형을 따라 계속 배구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아, 형은 더 이상 배구를 하지 않는다.
Q. 배구의 어떤 매력이 본인을 이끌었는지.
아무래도 공격할 때 짜릿함이 아니었을까. 공을 때리는 소리, 날아가는 모습 모두 매력적이다. 큰형이 내리꽂는 스파이크는 정말 일품이었다. 그 모습에 반했다.
Q. 배구 외에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나는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타입이다. 그래서 주로 밖에 나가서 활동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주변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그럴 여유가 없을 땐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곤 한다.
Q. 한국에서 가본 인상적인 곳이 있는지.
지난번에 경복궁을 간 적이 있다. 경복궁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도심에 그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Q. 배구를 할 때 본인에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내 여자친구, 미래 아내가 될 나탈리아다. 나탈리아는 나와 가장 가깝고 나를 제일 도와주는 사람이다. 정말 큰 힘이 되기에 고맙다는 말 해주고 싶다. 나탈리아가 오늘(23일) 한국에 입국했다. 이제 내 정신적인 면을 나탈리아가 채워줄 것이다. 불안했던 부분이 채워졌으니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웃음).
지금처럼 달린다, 우승을 향해!
Q. 한국 팬들을 본 느낌은 어떤가.
관중들은 정말 열정적이다. 소리를 지르고, 크게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진정 배구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를 향한 애정 역시 진심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배구를 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Q. 꽤 여러 경기가 치러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팀이나 선수는.
KB손해보험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연습경기에서도 몇 번 붙어봤지만 정말 멋진 팀이었다. 체계가 잘 잡혀 있는 팀이란 게 느껴졌다. 물론 시즌 초반이기에 아직 많은 걸 판단하기는 이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전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수들 가운데에는 KB손해보험 알렉스, 대한항공 가스파리니가 엄청나다. 현재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는 것 같다.
Q. 체격이 커 기나긴 정규리그를 버틸 체력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굉장히 대답하기 어렵다. 대답하기 조심스럽다.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통해 이 몸을 만들었는지 잘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정말 공들여 만든 것이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근육이 커 스태미나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힘이 있다. 반대로 근육이 적은 선수들은 스태미나가 좋아도 힘은 약할 것이다(웃음).
Q. 동료들과 많이 친해졌는지.
서재덕 윤봉우 전광인과 친하다. 특히 서재덕과 많이 친해졌다. 평소 몸을 풀 때나 훈련할 때 즐겁게 생활한다. 윤봉우 전광인과도 평소 많은 시간을 보낸다. 농담도 많이 하고. 이번 시즌 굉장히 재밌는 시즌이 될 것 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외에도 대부분 팀원들과 친해 밝은 분위기가 나온다. 그게 우리 팀 최고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좋은 모습으로 응원해주는 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다. 좋은 기억, 좋은 경험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그게 내 역할이다.
Q. 목표는 여전히 우승인가?
Why not? 안될 것 없다.
Behind Story
펠리페 네가 오늘 밥 사라!
인터뷰를 진행한 10월 23일은 한국전력이 수원역에서 팬 사인회를 진행한 날이었다. 밖에서 저녁을 먹게 된 한국전력 김철수 감독은 펠리페에게 “인터뷰한 기념으로 밥 사라!”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대답은? “인터뷰가 너무 길었어요. 안 돼요”였다. 김 감독은 펠리페가 돈을 차곡차곡 모아 가족들을 위해 쓰고 있다고 했다. 성실함과 검소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프러포즈 대작전!
23일 새벽 펠리페 여자 친구 나탈리아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하게 됐다. 이에 김 감독은 펠리페를 불러 “직접 마중 나가라”라고 했다. 이에 펠리페는 매우 기뻐하며 김 감독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또 한 가지, 펠리페는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온 나탈리아에게 곧바로 프러포즈를 했다. 이번 시즌을 마친 뒤 결혼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글/ 이광준 기자
사진/ 이광준 기자, 더스파이크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1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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