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배구사전

이광준 / 기사승인 : 2017-08-25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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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오마주한 이번 코너.


배구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던 신참이


재야 고수들을 찾아가 배구와 관련된 별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


배구박사 배 박사와 배구도사 공 도사의 만담 랠리!


(배구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가상의 두 인물을 설정해 대화로 풀어가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배구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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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박사 > 배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 시작부터 알아야겠지요. 다들 알다시피 배구는 미국에서 시작됐습니다. 1895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YMCA 체육부장 윌리엄 모건이 고안한 것입니다.



공 도사 > 배구가 만들어지기 4년쯤 전, 그러니까 1891년에 또 다른 실내스포츠 농구가 만들어졌죠. 메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 시 YMCA에서 근무하던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농구의 기본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상류층은 대부분 과격한 야구 미식축구를 주로 즐겼죠. 네이스미스는 이들보다 좀 덜 과격한 운동을 위해 농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농구는 몸싸움을 엄격히 금지했죠. 물론 점차 몸싸움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발전했지만요.



배 박사 > 그런데, 모건은 초창기 농구마저도 과격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모건은 남녀노소가 모두 한 경기장 안에서 운동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가운데에 네트를 치게 된 것이죠. 영국에서 유행하던 테니스 형태를 따 온 것이었어요. 네트를 치니 확실히 덜 위험해졌어요. 아무래도 상대와 부딪히지 않으니까요.



모건_1.jpg



공 도사 > 자, 배구 초기 모델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배구의 이름은 ‘민토넷(Mintonette)’이었어요. 무슨 뜻이냐고요? 큰 의미는 없는 말입니다. 고안해낸 모건이었지만 이름 붙이는 데는 소질이 없었나 봐요. 이후 스프링필드 시 YMCA에 근무하던 할스테드 박사가 시범경기를 보고 ‘공을 땅에 닿지 않은 채 네트 위로 넘긴다’라는 의미로 발리볼(Volleyball)이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발리(volley)는 테니스나 축구에서 공이 땅에 닿지 않고 쳐내거나 차는 기술을 의미하죠. 축구에서 발리슛 아시죠? K리그 전북 이동국 선수 주특기 있잖아요. 그 의미입니다.



배 박사 > 이렇게 미국에서 시작된 배구는 점차 주변국으로 퍼져나갑니다. 원산지(?)는 미국이지만 사실 미국 내에서는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했어요. 오히려 주변국들에 의해 주목 받기 시작했죠. 1922년 YMCA 선수권대회가 공인대회로서 맨 처음 개최, 큰 성황을 이뤘습니다. 이어 1946년, 프랑스를 주축으로 소련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 등 14개국이 참가한 국제배구연맹(International Volley Ball Federation)이 창설됩니다. 국제축구연맹(FIFA, 1904년 설립), 국제농구연맹(FIBA, 1932년 설립), 국제야구연맹(IBAF, 1938년 설립) 등에 비하면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남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점차 저변을 넓혀 나갔습니다.



왜 미국에선 배구가 주목 받지 못했을까요?


공 도사 > 그러게요. 스포츠 거대 자본인 미국이 배구에 관심을 가졌다면 아마 더 크게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배 박사 > 아무래도 먼저 발전하기 시작한 농구가 있어 상대적으로 배구는 덜 주목 받은 것이 컸습니다. 배구가 후발주자로서 농구를 역전할 만한 요소가 딱히 없었던 것이죠. 어린 선수들 역시 그렇습니다. 굳이 큰 시장이 형성된 농구를 두고 배구를 선택할 필요가 없었죠. 농구와 배구는 요구하는 능력치(키, 점프력 등)가 비슷하다 보니 이쪽으로 가망성 있는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 농구 쪽으로 많이 몰렸어요.



빈스-카터_1.png



공 도사 > 아,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죠. 바로 아직도 현역으로 활약 중인 새크라멘토 킹스 소속 빈스 카터(40세)예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던 그는 배구 국가대표 제의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굳이 천문학적 돈을 받을 수 있는 NBA(미국 프로농구리그)를 마다하고 배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결국 제의는 무산되고 빈스 카터는 농구에서 슈퍼스타가 됩니다.



배 박사 > 개인적인 생각으로 배구가 과격함이 떨어지는 것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하기에 배구만큼 좋은 스포츠가 없는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관전하는 입장에선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나 대신에 선수들이 격렬하게 부딪혀주길 바랄 수 있거든요. 내가 싸우는 건 싫어도 남 싸우는 걸 구경하는 건 좋아하는 게 인간 심리잖아요. 그런 점에서 농구가 일정 부분 충족시켜줬기 때문에 자연스레 배구가 덜 주목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 도사 > 과격함을 빼니 자극적인 맛이 사라졌다…. 대중화를 위해 선택한 것이 한편으로는 독이 된 셈이네요.



미국배구1_1.png



예전 배구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서브


공 도사 > 배 박사, 예전에는 서브 블로킹이 가능했단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과거에는 서브를 블로킹을 피해 높게 줄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서브가 공격의 의미를 갖기보다는 말 그대로 서비스, 상대편에 공을 넘긴다는 의미가 컸죠.



배 박사 > 맞아요. 그래서 과거에는 올려 치는 서브가 대세였죠. 블로킹을 피하기 위해서요. 그러다가 1984년 FIVB에서 서비스블로킹을 금지시켰습니다. 서비스블로킹은 장신 선수에게만 유리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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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도사 > 만약 이 규칙이 계속 남아있었다면 지금처럼 강력한 서브는 못 봤을지도 몰라요. 높이 날아올라 상대방 코트 위로 내리꽂는 서브는 배구를 보는 또 하나의 매력이니까요. 아, 스파이크 서브 하니까 과거 고려증권 장윤창 선수가 생각이 나네요.



배 박사 > 장윤창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어요. 세터와 공격수 모두 소화 가능한 재능 있는 선수였죠. 무엇보다 장윤창이 대단한 것은 스파이크 서브 때문이겠죠? 돌고래 같이 뛰어올라 때리는 서브로 인기가 높았던 주인공이니까요.



공 도사 > 맞습니다. 장윤창이 처음으로 스파이크 서브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1978년 중국의 한 선수가 기묘한 자세로 때리는 서브를 보고 장윤창이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죠. 이는 곧 서양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격적인 서브’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배 박사 > 서브 하니까 또 생각이 나네요. 과거에는 서브가 네트를 맞고 넘어가면 다시 서브를 했죠. 마치 테니스처럼 말이죠. 지금은 그렇지 않죠? 네트 위 백태 부분을 맞고 넘어가더라도 경기가 그대로 진행되잖아요. 이는 2000년부터 변경된 사안입니다. 어때요?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공의 신체 접촉


신체접촉_1.png



공 도사 > 배구는 발을 사용해도 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배 박사 > 그렇습니다. 배구는 자칫하면 상체만 사용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죠. 그러나 꽤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해오면서 지금처럼 온 몸에 다 맞아도 되도록 바뀌었죠. 1920년, 초창기 배구는 허리 위에만 공이 접촉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937년, 강력한 스파이크에 대한 수비 시에는 몸 어느 부위든지 접촉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공 도사 > 허리 위쪽 부위로만 수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탓이겠지요. 여하튼 허리 위까지만 적용되던 규칙은 1942년, 무릎 위까지 허용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22년 걸려서 허리에서 무릎까지 내려가게 됐네요.



배 박사 > 그러면 지금처럼 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놀랍게도 1990년대 들어서야 가능해졌습니다. 1994년 공식적으로 발을 포함한 신체 모든 부위 사용이 허용됩니다. 허리에서 발까지 내려오기까지는 74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네요. 이 시간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속된 시간하고 맞먹는 시간이에요. (소비에트 연방, 1917~1991)



포인트


공 도사 > 최근 FIVB에서 15점-7세트 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던데요. 점수 운영과 관련된 문제는 이전부터 FIVB가 계속 고민해 온 사안입니다. 배구 인기와 직결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인데요.


배 박사 > 맞습니다. 현행 제도인 ‘25점-5세트 랠리포인트’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2000년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돼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15점-5세트 사이드아웃제’로 득점 시 점수가 아닌 서비스권을 주고 서비스권을 가진 팀이 득점할 경우에만 점수가 올라가는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했습니다.



공 도사 > 15점-사이드아웃제는 꽤 역사가 길어요. 첫 배구 규칙을 제정할 당시에는 세트 당 21점-5세트 사이드아웃제였죠. 그러나 경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고자 1917년부터 ‘15점-5세트 사이드아웃제’가 시행됐습니다. 따져보면 사이드아웃제는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었네요.



배 박사 > 그런 점에서 FIVB가 사이드아웃제를 랠리포인트제로 바꾼 부분은 대단히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평가하고 싶어요.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위해 배구의 승패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규칙을 바꾸려고 했다니. 혁신적인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공 도사 > 한편으로는 이번 ‘15점-7세트 랠리포인트제’ 도입을 추진하는 것은 너무 급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아직 규칙이 바뀔 것인지 확정된 상황은 아니지만요.



배 박사 > 세트 점수를 15점으로 줄이고 7세트제로 바꾸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경기 시간이에요. 지금은 3세트 경기와 5세트 경기 간 시간 편차가 너무 커요. 3세트 경기는 대체로 70~80분 소요되는 반면 5세트 경기는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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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도사 > 그렇게 되면 보는 사람도, 중계하는 사람도 문제가 생기게 되죠. 보는 사람은 같은 돈을 주고 어쩔 때는 한 시간을, 어쩔 때는 두 시간 반을 즐기게 됩니다. 그 편차가 너무 크죠. 또 중계하는 입장에서는 끝나는 시간을 어떻게 예상해야 할지 어려움이 생겨 운영에 차질이 생기죠.



배 박사 > 그래서 FIVB가 이와 같은 변화를 준비하는 것이겠죠. 세트 길이를 줄이게 되면 아무래도 편차가 줄어들 수 있으니까요.



공 도사 > 그렇지만 7세트까지 가는 경기를 생각해보면 이것 또한 문제가 됩니다. 단순히 점수로만 비교하면 5세트제 115점 vs 7세트제 105점으로 10점이 줄어들게 되지만 중간중간 광고, 휴식시간을 따져보면 오히려 7세트까지 가는 경기가 더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배 박사 > 그래서 FIVB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점수 제도와 관련된 변화는 신중해야 할 겁니다. 현장에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이 기자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공 도사 > 아~ 너무 옛날 얘기만 꺼낸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땐 좀 더 신선한 주제로 이야기해봐요.



배 박사 > 그래도 오래간만에 배구를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혹시나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더 준비해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다음에 또 만나요~.



더 쓸데없는 자투리 사전 ‘서브 편’


근래 들어서는 스파이크 서브보다 플로터 서브가 주목을 받고 있다. 스파이크 서브는 빠르고 각이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리만 잘 잡으면 충분히 리시브가 가능하다. 또 범실 위험도 큰 기술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적타성 플로터 서브가 유행하고 있다. 무회전으로 날아가는 공은 흔들리면서 상대 리시버들에게 혼란을 준다. 또 스파이크 서브보다 정확하게 넣을 수 있어 범실 가능성도 적다. 무엇보다 원하는 상대에게 정확히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최근 세계적으로 스파이크 서브보다 플로터 서브가 인기를 끌고 있다.



자투리 인물사전 ‘장윤창’


출생 : 1960년생


신장 : 195cm


포지션 : 세터, 아포짓스파이커


경력 : 1977~1992 배구 국가대표팀 선수


1983~1994 고려증권 배구단 선수


2011.11~ 현재 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



1980년대 배구계를 휩쓸었던 선수.


총 15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8세 되던 해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돼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세웠다.


1983년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합류, 제 1회 대통령배 배구대회(1984)에서 인기선수상을 시작으로 숱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공격수. 몸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펴는 이른바 ‘돌고래 서브’로 배구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몰고 왔다. 장윤창의 공격적인 서브는 ‘서브도 하나의 공격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이는 곧 널리 퍼져 전 세계적인 유행을 끌게 된다.



글/ 이광준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자료제공/ 대한민국배구협회



(이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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