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즌을 치르는 데 선수는 대체 몇 명이나 필요할까. 선발 라인업에 드는 7명?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약 6개월간 열리는 대장정을 위해서는 베스트 멤버만큼이나 교체선수들 역할이 중요하다. 큰 힘을 보태며 팀을 즐겁게 만들어준 교체선수는 누가 있을까?
교체선수란 말 그대로 경기에 참여 중인 선수가 부상을 당하거나 쉬어야 할 때 그를 대신해 투입되는 선수다. 교체선수도 주전 멤버들만큼이나 고충이 크다. 부상선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팀에서 언제 자신을 필요로 할지 모르니 매 순간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야 한다. 또한, 갑작스레 들어가 제 기량을 제때 발휘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기에 교체선수들이 일으키는 반란, 즉 깜짝 활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게끔 한다. 특히나 올 시즌에는 세터 때문에 V-리그 남녀부 많은 팀들이 울고 웃었다. 세터가 바뀌면 모든 공격수와 플레이를 다시 가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팬들을 즐겁게 했던 ‘깜짝 쇼’를 살펴본다.
이고은, 생애 첫 라운드 MVP까지
이고은은 2013~2014시즌 1라운드 3순위로 도로공사에 지명됐다. 데뷔 첫 해에는 세터 차희선과 최윤옥 그늘에 가렸다. 2014~2015시즌에는 FA로 이적해온 이효희가 주전 세터를 꿰찼다. 그래도 이고은은 원 포인트 서버로 틈틈이 코트를 밟았다. 당시 도로공사가 6라운드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뒤 정규리그 잔여 두 경기에 선발 출전해 경험을 쌓았다. 지난 시즌까지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 한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김미연과 함께 IBK기업은행으로 트레이드 됐다. 전새얀과 최은지가 도로공사로 향했다.
그런 이고은에게 이번 시즌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주전 세터 김사니가 종아리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것. 2라운드 첫 경기부터 선발로 나선 이고은이 총 4경기를 이끌었다. 결과는 2승 2패였으나 그리 만족스러운 활약은 아니었다. 이고은은 종종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며 김하경과 교체되곤 했다. 이후 2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김사니가 복귀하며 이고은은 웜업존으로 돌아갔다.
4라운드 말미 김사니에게 다시 이상이 생겼다. 종아리 부상과 더불어 허리 디스크가 겹친 것이었다. 결국 이고은이 5라운드 전 경기를 소화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IBK기업은행은 무려 라운드 전승을 기록했다. 풀세트 경기를 치르지 않아 승점도 3점씩 꼬박꼬박 챙겼다. 6라운드 초반까지 선두였던 흥국생명 뒤를 바짝 쫓으며 선두 경쟁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이고은이 훨씬 향상된 경기력을 선보였다. 주 공격수인 리쉘과 호흡에서 안정을 찾았고, 중앙 공격수와 세트플레이를 만드는 데도 능해졌다. 세트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힘을 보탰으며 단신(170cm)이나 유효 블로킹도 꽤 만들어냈다. 이고은은 “예전에는 무작정 열심히 하려고 했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하면서 임한다. 경기 전 영상을 보며 상대 블로커 움직임을 많이 분석했다”라며 비결을 밝혔다.
IBK기업은행 이정철 감독도 이고은을 도왔다. 우선 이 감독은 “뭔가 더 해내려고 하면 플레이가 급해진다. 성실하게 볼 높이, 네트와 간격 등 공격수 리듬을 맞춰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본에 충실하면 잘 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이고은도 “처음에는 감독께서 화도 내셨지만 이제는 오히려 달래주며 괜찮다고 해주신다. 잘한다는 칭찬도 들었다”라며 웃었다.
팀에 닥친 위기를 스스로 헤쳐나간 이고은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5라운드 여자부 MVP로 당당히 선정됐다. 총 29표 중 15표를 얻었다. 귀중한 순간이 행복하게 지나고 있다.
‘묵묵한 공헌’ 원조 서브 퀸 이소라
이소라는 2005~2006시즌 1라운드 2순위로 GS칼텍스에 입단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된 윙스파이커 김연경(페네르바체)이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에 호명됐고, 그 다음이 이소라였다. 목포여상 재학 시절 김연경과 함께 여자배구 사상 세 번째로 고교생 신분으로 국가대표 팀에 승선할 정도로 촉망 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그 해 3라운드 후반 고질병인 과호흡증후군에 시달렸다.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며 마음고생을 한 그는 코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배구가 떠나질 않았다. 2008년 6월 복귀하기로 마음 먹고 2008~2009시즌 배구 팬들과 마주했다. 다음 시즌에는 트레이드로 도로공사 소속이 됐다. 많은 경기를 치르며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2010~2011시즌을 마치고 그는 돌연 배구공을 내려놓았다. 실업 팀인 수원시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2015~2016시즌을 앞두고 도로공사 부름에 응답하며 팀으로 돌아왔다.
올 시즌 이소라는 주로 원 포인트 서버로 출전했다. 주전 세터 이효희가 흔들릴 때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 4라운드 후반부터 5라운드 중반까지는 이효희 대신 오랫동안 코트에 머물며 공격을 조율했다. 손끝은 다소 굳었지만 서브는 녹슬지 않았다. 범실 없이 위력적인 스파이크 서브를 구사했다. 일례로 지난 1월 20일 흥국생명과 경기를 들 수 있다. 3세트 18-23으로 뒤지던 도로공사. 이소라 서브에이스를 시작으로 반격을 알렸다. 결국 26-24로 점수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썼다. 물론 이날 세트스코어 2-3으로 석패해 아쉬움은 남았다.
뒤를 받치는 이소라가 있어 이효희도 더욱 분전했다. 6라운드 초반 시즌 첫 3연승을 달리며 승리의 달콤함을 맛봤다. 이소라는 다시 세터이자 원 포인트 서버로 팀에 공헌하게 됐다.
작은 고추가 맵다, 이민욱
이민욱은 2014~2015시즌 1라운드 7순위로 삼성화재에 지명됐다. 그러나 팀에 유광우라는 독보적인 주전 세터가 있기에 좀처럼 자신의 실력을 펼쳐 보이지 못 했다. 프로 첫 시즌 그가 시도한 세트는 고작 3개뿐이었다. 2년 차가 된 지난 시즌에는 총 29개 세트를 시도해 12개 성공했다. 이민욱 역할은 세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원 포인트 서버였다.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맡은 바에 충실했다. 까다로운 서브를 연구해 상대를 흔들었다.
이민욱은 올 시즌만큼은 세터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증명했다. 지난 3라운드 12월 10일 경기를 회상해보자. 이날 삼성화재는 대한항공에 세트스코어 3-2로 신승을 거뒀다. 배경에는 교체 투입된 이민욱 활약이 있었다. 3세트 초반 들어온 그는 박철우와 찰떡 같은 호흡을 선보이며 승리를 만들었다. 박철우는 3세트에만 10득점, 공격 성공률 73%로 펄펄 날았다. 2월 7일 우리카드와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삼성화재는 우리카드에 세트스코어 3-2로 역전승을 기록했다. 1세트를 내준 뒤 분위기가 다소 침체돼있었다. 2세트에도 3-5로 끌려가자 유광우 대신 이민욱이 투입됐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코트를 지키며 팀에 승리를 선사했다. 타이스에게 올리는 공에는 비교적 자신이 없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타이스(36득점, 공격 성공률 59%)와 박철우(27득점, 공격 성공률 57%)를 골고루 살려냈다.
삼성화재 임도헌 감독은 이미 올 시즌 초반부터 “민욱이가 세트한 공에는 힘이 실려있다. 뒤로 하는 세트가 좋은 선수다. 아직 어려서 위축되기도 하나 제 몫은 해준다. 아포짓 스파이커를 적극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민욱이가 필요하다. 계속 기용하며 기회를 줄 것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민욱 본인도 “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전으로 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출전 시간이 적어도 틈틈이 경기에 기용되는 걸 기회로 생각하고 선배들 강점들을 배우고 있다. 공격수들이 공을 잘 때릴 수 있게 연결하자는 생각만 하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 팀 승리에 도움이 되고 싶다. 코트에 단 몇 초만 나오더라도 힘을 보태는 것이 내가 맡은 임무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이민욱 성장에 기분이 좋은 삼성화재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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