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터뷰] 굳세어라 그 이름 나, 전광인이야

정고은 / 기사승인 : 2017-01-19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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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인. <더스파이크>에 가장 자주 등장한 이름 중 하나다. 물 맑은 동네 경남 하동에서 뛰어 놀던 어린이가 V-리그를 호령하는 선수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담았다. 더불어 훗날 그가 꿈꾸는 미래 모습도 그려봤다. 전광인이 쓰는 자서전은 어떤 문장으로 채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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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린이, 동작 그만!


1991년 9월 18일, 경상남도 하동에 우렁찬 울음소리가 퍼졌다. 전광인이 세상과 처음 마주한 날이었다. 그는 고향 하동을 ‘살기 좋은 동네’라 표현했다. “공기가 좋아요. 산이나 강이 있어 풍경도 멋지고요. 근데 저희 동네 시골 아니에요! 저 읍에 살았어요. 읍내 아시죠? 하동의 ‘강남’에 살았어요.”



어린이 전광인은 무럭무럭 자라 하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장난꾸러기였다. “매일 친구들과 간식 사먹고 다같이 PC방 가고 그랬어요. 지금 제가 (서)재덕이 형한테 하는 장난이 다 그때부터 시작된 거예요. 친구들 머리 잡고 장난으로 한 대 때리고요. BB탄 총 싸움도 하고요. 심한 장난도 있었죠. 아파트 제일 위층에 올라간 다음에 내려 오면서…알죠? 벨 누르고 도망가는 거예요. 동네에 고등학교 3학년 형이 있었는데 저희 대장이었어요. 4~5명이 모여서 참 재미있게 놀았죠. 분유 통 같은 걸 얻어서 구멍을 송송 뚫어요. 거기에 불 피워서 달고나 해먹고 쥐불놀이도 했어요. 아, 너무 촌 같은가요?” 공부에도 관심은 있었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인생 최대 적을 만났다. 3살 터울 친형이었다. “정말 치고받고 많이 싸웠죠. 제가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는 많이 대들었거든요. 유독 저희가 좀 심했던 것 같아요. 근데 형제들은 다 싸우면서 큰다고 하잖아요. 덕분에 우애도 깊어졌죠.”



꼬마 전광인은 배구를 전혀 몰랐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배구공을 잡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삼촌이 초등학교 코치님하고 친했어요. 하루는 삼촌이 ‘광인아, 내가 집에 두고 온 핸드폰 좀 가지고 와라’ 하시더라고요. 심부름 갔다가 선수들이랑 다같이 밥을 먹었어요. 코치께서 ‘너 내일부터 운동 나와라’ 하시는 거예요. 삼촌도 ‘그래 나가봐’라고 거드셨어요. 그게 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예요. 특별한 이유가 없었어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요. 배구부 들어가서 운동을 해보니 그제야 ‘이게 배구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재미있더라고요.”



배구만큼 흥미로운 것도 많았다. 미니카를 조립하거나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다같이 모여서 노는 장소가 저희 집에서 다 보였어요. 제가 집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밖에서 친구들이 ‘광인아~노올자~’하고 불러요. 그럼 바로 뛰쳐나갔죠. 친했던 친구들이 참 많았는데 이젠 다들 바빠서 자주 못 보는 거 같아요.”



초,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키가 작았던 전광인. 쉽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 했다. 마음고생도 꽤 했다. “초등학생 때는 그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한 선수였어요. 중학교 때도 경기를 뛰긴 했지만 저보다 잘하는 선수들이 훨씬 많았죠.” 그러던 그는 진주동명고로 진학하며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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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에이스로 거듭날 운명


고등학생이 되자 키가 커지며 자연스레 힘이 붙었다.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배구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더라고요. 한창 배구가 재미있던 때라 연습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는 2008년 아시아청소년 남자배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



다음 행선지는 성균관대였다. 10학번으로 입학한 전광인은 2학년이던 2011년에 월드리그 성인 대표팀에 승선했다. 그리곤 배구계에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쟁쟁한 프로 선배들과 국제무대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학교에선 풋내기 대학생이었다. 시험기간이면 답안지에 하트를 가득 넣은 편지를 쓰곤 했단다.



일찌감치 전광인은 ‘포스트 신진식’이란 영광스런 수식어 주인공이 됐다. 공격은 물론이거니와 탁월한 수비력까지 인정받았다. 현재 소속팀인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은 전광인에게 “국내 윙스파이커 중 가장 수비를 잘한다. 선수로서 근성이 대단하고 실력이 출중하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공수에서 활약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기본기 훈련을 아주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공을 정말 많이 때렸고요. 그러다 보니 볼이 눈에 많이 익더라고요. 수비할 때 ‘상대가 저 볼을 어떻게 때릴까’라고 생각해요. 상대 공격수 폼이 눈에 보여요. 공격 방향을 예상해서 순간적으로 따라가는 건데 잘 되는 것 같아요.”



전광인은 꾸준히 대표팀을 오가며 성균관대에서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드디어 프로선수로 발돋움하기 위한 관문에 섰다. 2013~2014시즌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KEPCO(현 한국전력)가 전광인을 품에 넣었다. 그는 곧바로 데뷔했고, 시즌 종료 후 신인선수상을 거머쥐었다. 프로 2년차인 2014~2015시즌에는 라운드 MVP를 2번이나 차지한 데 이어 올스타전 MVP까지 수상했다. 베스트7 윙스파이커 부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광인은 그렇게 탄탄대로를 달렸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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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나는 그 이름이 아프다


지난 2015~2016시즌 전광인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왼쪽 무릎과 양쪽 발목이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경기장에 있는 것 자체가 무서웠어요. 저에게 공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죠. ‘너무 못해 팀에 폐만 끼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제가 원하는 대로 플레이가 안 나오니까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요. 공격을 아무리 해도 득점이 안 났으니까요. 저절로 위축됐어요.”



그뿐만 아니었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하나둘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전광인은 힘겹게, 아주 머뭇거리며 당시 이야기를 전했다.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거죠. 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해하려 했어요. 그래도 아쉬웠어요. 배구선수 전광인이 잘하든 못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전광인이라는 사람과 늘 똑같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어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같은 마음을 갖고 대할 줄 알았죠. 제가 부진하니까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참 어려웠어요. 한편으로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 됐어요. 내 편이 아닌 사람을 단정지을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안 될 때 더 힘이 돼준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그렇게 떠날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만 남는 거더라고요. 곁에 있어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베풀고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올 시즌 시작 전 한국전력은 KOVO컵 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맛봤다. MVP는 역시 전광인 몫이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좋은 컨디션으로 시즌을 맞았다. 그러나 전반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다시 발목 부상이 찾아왔다. “힘들죠. 솔직히 조금 힘들어요. 부상은 예고 없이 찾아오잖아요. 버틴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거예요. 작년에 비하면 이 정도는 몸 상태가 좋은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경기에 임하고 있어요. 컨디션이 계속 좋을 순 없잖아요. 언제 또 아플지 모르는 거고요. 위기를 견디고 이겨내는 힘을 기르려고요. 부상을 최대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죠. 경험을 통해 계속해서 방법을 찾으면 나중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팀 내 대체불가 에이스이기 때문에 괜찮아야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부담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팀에서 제가 해야 할 임무가 확실하게 있고, 그걸 잘 이행했을 때 좋은 결과가 따라오니까요. 그래야 팀 경기력도 더 좋아지는 것 같고요. 코트에서도 항상 책임감을 갖게 돼요. 제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수비나 블로킹 등 다른 걸로 팀에 활기를 불어넣는 선수가 되려고 노력 중이에요.”



전광인은 지난 시즌 아픔을 발판으로 한층 단단해졌다. “어떻게 보면 그때 잘 이겨내서 지금은 좀 편한 듯해요. 예전에는 제 생각하기 바빠서 저 혼자만으로도 너무 벅찼거든요. 이제는 제가 힘들어도 동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대화를 통해 힘을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됐다고 할까요? 이게 다 팀이 잘 나가고 있는 덕분이죠. 모든 포지션에서 균형이 잘 맞아 떨어지고 있어요. 전반기 승률도 좋았고요. 상대 팀이 확실히 무서워할 수 있는 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몸 건강을 위해 나름대로 규칙도 세웠다. “챙겨먹는 보양식은 별로 없어요. 다만 경기 후에 먹는 밥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선수들은 저녁을 경기가 끝난 뒤에 먹거든요. 근데 힘든 날은 입맛이 하나도 없어요. 지난 시즌만 해도 물만 겨우 마시고 밥은 한 술도 못 먹었어요. 이제는 아무리 힘들어도 무조건 한 그릇은 먹자고 스스로와 약속했어요. 왜냐면 운동 후에 먹는 음식이 선수에겐 가장 중요하거든요. 최대한 지키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가족들은 걱정을 떨치지 못 했다. “부모님이 훈련할 때나 경기 끝날 때마다 계속 몸 상태를 물어보시죠. 늘 괜찮다고 말해요. ‘경기 뛰는 거 보지 않았냐. 뛸 수 있을 정도면 괜찮은 거다.’ 이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요. 제가 더 밝게 얘기하면서 최대한 걱정을 안 끼쳐 드리려고 하죠.” 전광인의 진심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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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그대는 언제부터 이렇게 멋졌나


‘머털도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광인. “닮았어요? 똑같이 생겼어요? 그건 아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대표팀에 들어갔잖아요. 그때 형들이 저보고 ‘머털이’라고 했어요. 제 머리가 삐죽삐죽 뻗치는 스타일이거든요. 경기 중에 땀 흘리며 뛰어다니면 더 심하고요. 별명이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인터뷰 당시 화보 촬영을 위해 머털도사 사진을 보여주며 비슷한 포즈를 요구했다. 처음엔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으나 이내 멋지게 자세를 취해주던 전광인이었다.



올 시즌 도중 전광인은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귀여운 일자 모양 앞머리로 주목 받았다.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에요. 머리를 자르고 나서도 이런 모양인지 몰랐어요. 미용사분이 앞머리까지 쭉쭉 엄청 펴주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어? 어차피 씻으면 소용 없어질 텐데 드라이로 멋지게 만들어주시네’라고 생각했죠. 그때는 모양이 정말 괜찮았어요. 근데 운동 끝나고 샤워 후에 거울을 봤는데 ‘머리가 왜 이래?’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앞머리가 일자라는 걸 알게 됐죠. 완전히 동그랗게 말려있더라고요. ‘아…일부러 펴신 거구나. 내가 당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팬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었어요.”



그는 외모에 유난히 자신이 없었다. “얼굴이 콤플렉스예요. 외모에 관해서는 형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한 번도 못 들었어요. 형들이 ‘네가 조금만 더 잘생겼으면, 평범하게만 생겼어도 좋았을 텐데’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 머릿속에 박혀있어요. 근데 인정해요 저는. 제가 인정이 좀 빨라서요.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해요. 만족하며 살아야죠.”



그러나 전광인은 V-리그 대표 미남인 문성민(현대캐피탈)을 제치고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남자부 최다 득표 1위를 달렸다.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정작 본인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저도 제가 왜 인기가 많은지 정말 알고 싶어요. 궁금하거든요. 왜 저를 좋아해주시는지 모르니까 다른 선수들에게 자랑을 못 해요. 제가 농담으로 ‘요즘 분들은 너무 잘생긴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한다’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면서 위안을 삼죠.”


팬들에게 잘하기로 소문난 전광인. 그 따듯한 마음이 인기 비결이 아닌지 물었다. “선수로서 팬 서비스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경기장까지 찾아와주시는데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죠. 응원해주시고, 경기 끝나고 기다렸다가 선물도 주시고요. 오히려 저희에게 고맙다고 해주시니 더 감사하죠.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겨울에 추운데 찾아와주시는 게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니까 당연히 잘 해야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전광인은 응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선수였다.



전광인 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이름이 있다. 성균관대-한국전력 선배인 서재덕이다. 유난히 그와 사이가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팀 선수들과 다 친하거든요. (윤)봉우 형, (강)민웅이 형, (오)재성이 등에게도 애교부리고 장난치고 하는데 유독 재덕이 형한테 하는 것만 눈에 띄더라고요. 저는 좋아요. 의도적으로 노린 건 아니고요. 기분에 따라 행동이 좌우돼요. 경기 중에 득점 내면 좋잖아요. 별다른 생각 없이 나오는 거 같아요. 좋으니까 그 사람에게 뭐든 표현을 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볼도 만져주고 ‘아구 잘했다~’ 하는 거예요. 칭찬해주고 싶은데 그냥 하면 너무 싱거우니까 저만의 방식으로요.”



타 팀 선수들뿐 아니라 다른 종목 선수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쌓았다. “거의 다 친분을 유지하고 있어요. 대표팀에서 만난 인연들이 많죠. 후배들이 인사하면 좋게 받아주고요. 애들이 먼저 다가오면 좋죠. 어떤 선배가 그걸 마다합니까? 타 종목 중에는 농구선수 (김)종규(창원 LG)랑 친해요. 저랑 동갑이에요. 대표팀에 있을 때 선수촌에서 종목별 선수 몇 명이 식당에 모인 적 있었어요. 촌장께서 서로 얼굴도 익히고 인사하며 다니면 좋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일렬로 서서 한 명씩 인사를 나눴어요. 종규가 제 앞에 왔는데 ‘우리 같은 해에 데뷔해 둘 다 신인상을 받았다’라면서 먼저 친근하게 말을 붙여주더라고요. 저도 ‘아 그냐~나도 알고 있었다’라고 했어요. 그때 말문이 트여서 친해졌죠. 요즘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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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저 넓은 바다, 어디라도 외로울까


2017~2018시즌이 끝나면 전광인은 FA 자격을 얻게 된다. 그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릴 터. 속마음은 어떨까? “저는 좀 모험적인 면이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죠. 일단 올 시즌 끝나면 재덕이 형이 FA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형 하는 거 봐야죠. 사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팀에 남고 싶은 마음도 크고,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직은 어려워요. 그때 돼도 모를 것 같아요. 프로 선수라면 본인 가치를 인정해주는 팀과 함께하는 게 제일 좋은 거죠.”



아직 얘기를 꺼내긴 이르지만, 전광인도 언젠가는 은퇴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방)신봉이 형처럼 오래하고 싶죠. 근데 다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냉정하게 판단할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더 해보자’라며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진 않으려고요. 제가 그때도 활용가치가 있는 선수인지 객관적으로 보고 결정을 내릴 것 같아요.”



은퇴 후 전광인은 무얼 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솔직히 감독도 해보고 싶어요. 사업 등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죠. 지금부터 감독, 코치 선생님들 하시는 말씀 들으면서 배우려고요. 그래야 저도 나중에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막간을 이용해 감독으로서 베스트7을 꾸려보라고 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우와 너무 힘든데요? 잘하는 선수가 많아서요. 일단 저부터 넣어주세요(웃음). 저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거 알지만 넣어주셨으면 해요! 오른쪽 포지션으로 갑시다. 아포짓 스파이커는 (문)성민이 형. 거기에 맞는 세터는 (한)선수(대한항공) 형. 왜냐면 선수 형이 저랑 좀 잘 맞아요. 제가 짜는 거니까 저한테 맞게 골라야죠. 미들블로커는 (신)영석이(현대캐피탈) 형이랑 (윤)봉우(한국전력) 형이요. 봉우 형이 공격 면에서 아주 좋거든요. 저희끼리는 ‘윤봉우 타임’이라고 할 정도예요. 리베로는 내 친구 (정)민수(우리카드). 윙스파이커 한 자리가 남았는데요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가질게요. 그래도 서재덕이죠. 그만큼 잘해요. 형이 이번 시즌 들어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야, 나 오른쪽보다 왼쪽에서 공 때리는 게 너무 편해’라고요. 이제 아포짓 스파이커는 부담스럽대요. 그 정도로 윙스파이커 포지션에 적응했기 때문에 이렇게 짜면 좋을 거 같아요. 캬~장난 아니죠?”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어섰다. 그는 결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연애할 때 정말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저보다 여자친구를 먼저 위하려고 하죠. 차라리 제가 힘든 게 낫다고 생각해요. 물론 장난기가 많아서 엄청 까불기도 하죠. 결혼은 스물 여덟쯤에 하면 어떨까 싶어요.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상대방과 생각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부모님들 의견도 들어야 하고요. 2세 계획은 여건이 된다면 아들 딸 한 명씩 낳고 싶어요. 더 욕심나기도 하는데요, 이것도 상대방 얘기를 들어 봐야죠. 아기를 가지고 싶은 제 바람보다는 아내 마음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미래를 위해 나름대로 알뜰살뜰 돈을 모으고 있어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노년기에 전광인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너무 멀리 가시는 거 아니에요(웃음)? 마음 같아선 좀 편하게 살고 싶어요. 미래라는 게 그 나이가 돼서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가족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봐야죠. 최대한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더 무리한 질문도 던져봤다. 위인처럼 본인 이름 앞에 호(號)를 붙여보라고 했다. “제 이름에 들어간 ‘광’자를 한 번 더 붙이고 싶어요. 왜냐면 ‘광’자가 빛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정말 안 좋은 뜻도 있잖아요. 그렇게 양면을 가지고 싶어요. 좀 이상한가요? 예를 들면 어떨 땐 아주 부드럽지만 또 한편으론 강인한 면도 가지고 있는 거죠.”



동행한 영상 기자는 그에게 ‘오광(五光)’을 추천했다. 그러자 전광인은 “오광이요? 25점이니 좋네요”라며 크게 웃었다.



기사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그에게 묘비에 적고 싶은 한 줄을 부탁했다. “와, 정말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요 기자님! 다음엔 환생한다고 할 거죠?”라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다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묘는 안 하고 싶어요. 차라리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할 거예요. 바다만 보면 편안하고 안정이 되더라고요. 눈을 감고 난 후에라도 자유롭고 싶어요.”



이 땅이 끝나는 곳에서 뭉게구름이 되어


저 푸른 하늘 벗 삼아 훨훨 날아 다니리라


이 하늘 끝까지 가는 날 맑은 빗물이 되어


가만히 이 땅에 내리면 어디라도 외로울까


- 동요 뭉게구름 中 -



끝으로 전광인에게 이 노래를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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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1


지금껏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해왔을 전광인.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에게 이젠 그만 듣고 싶은 지겨운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같은 질문을 받아도 대답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져서요. 어느 질문이든 긴장되기만 해요”라며 허허 웃었다.




Behind #2


2017년은 개인적으로 어떤 한 해가 됐으면 하는지?


“제 감정을 감추지 않는 한 해가 됐으면 해요. 사람이 힘들고 안 좋은 점은 감추게 되잖아요. 그런 거 없이, 제가 그럴 필요 없이 기쁜 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epilogue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까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전광인은 항상 웃었다. 나보다는 남을, 상대방을 먼저 생각했다. 사실 그의 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그는 형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전광인은 부모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중학교 때부터 용돈을 모아 적금을 들었다. 갖고 싶던 운동화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코 묻은 돈이 몇 푼이나 됐겠냐 마는 그것으로 고등학교 3년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대학 때도 미리 모아놓은 돈으로 버텼다. 행여 속상해하실까 부모님께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혼자서 척척 잘해준 효자 아들이었다. 언제나 의젓한 전광인. 그 모습이 아린 것은 왜일까? 그의 미소가 내내 마음에 맴돌았다.



글/ 최원영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 배구 전문 매거진 <더스파이크>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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