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저축은행에서 배구 인생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김형실 감독. 한국 나이 72세로 고령의 김 감독은 손녀뻘인 제자들과 호흡하며 배구 인생의 끝을 함께 하고 있다. 한평생 배구만 생각하고, 올해로 지도자 인생 48년째를 맞은 김형실 감독이 배구인들의 배구 인생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이정원의 발리볼데이트’ 네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배구 팬들에게 ‘할아방’, ‘할바리니’로 불리는 김형실 감독과 나눈 대화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짧은 선수 생활을 뒤로하고
지도자 길 걸은 김형실 감독
Q. 배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1963년도에 온양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촌 형들이 갔다 놓은 배구공을 가지고 놀았죠. 온양온천국민학교를 다닐 때 였을 겁니다. 1963년 9월에 배구를 좋아하던 이숙 선생님께서 배구팀을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하시더군요. 3학년, 4학년 학생 위주로 팀이 만들어졌습니다. 본격적인 창단은 1964년에 했고, 연습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했고요. 온양온천국민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 그대로 아산중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아산중에서 배구를 하는데 그때 도대항 대회를 나갔던 기억이 나요. 보문중 배구부와 경기를 했는데 심판의 부정적인 판정과 텃세로 패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리고 하다 보니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여기서는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대신중이 전국대회를 제패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작은 사촌 형이 수원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냈습니다. 1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대신중이 인창중보다 더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형의 도움을 받아 대신중 배구부 이강평 코치님과 김한수 교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있어 그 두 분은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한 분들입니다.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벽을 두고 150개, 200개씩 리시브 연습을 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기술은 되니 팀 성적도 좋았고 상도 여러 번 받았고요.
그리고 대신고로 진학을 했는데 1학년 때까지는 주전으로 뛰다가 이후에는 닭장(웜업존)에 머물렀습니다(웃음). 그래도 수비는 괜찮다고 평가받아 1969년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청소년배구선수권에도 출전했고요. 남녀대표팀 모두 우승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 만나러 청와대에도 다녀왔습니다.
Q.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졸업 후 대한항공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당시 정문경이라는 세터가 잘했습니다. 대한항공에 따라갔습니다. 대한항공이 당시 대신고 체육관을 쓰고 있었거든요. 또한 그때 대한항공 감독이 페루의 배구 영웅 박만복 감독님이셨습니다. 1년 정도 하다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입대했습니다. 당시 수경사 멤버가 강만수, 박기원, 이인희, 이선구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선수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다 1973년 1월에 불미스러운 일로 수경사가 사라졌고, 배구부가 해체됐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군 복무를 잘 마무리하고 한양대로 돌아갔습니다.
Q. 25살에 지도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선수 생활이 짧았습니다.
정말 키 크는 게 소원이었어요. 철봉에도 계속 매달리고, 좋다는 거 다 먹어보고요. 강만수, 박기원 이런 사람들은 다 키가 커요. 부러웠어요. 제가 선수로는 대성할 수 없다고 일찌감치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을 가고자 결심했고, 지도자 선생님들의 장점만 스케치했죠.
Q. 1975년 전설의 강팀 미도파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후배들도 가르치고, 한양여고 배구부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이어오다 1975년 12월 미도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창호 감독님 밑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184연승도 했잖아요. 그러다가 35살에 태광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최연소 감독이었어요. 다 40대, 50대였거든요. 또 태광산업이 10개 팀 중에서 9위에 머물렀거든요. 제가 1986년 9월에 부임했는데, 부임 후 3개월 후인 12월 대회에서 4강에 올랐어요.
Q. 감독님은 국가대표 지도자 이력도 상당합니다.
그렇죠. 82년도부터 해서 83년도에는 송세영 감독님을 모셨고, 84년 LA올림픽에서는 이창호 감독님과 함께 했고요. 그때 한국이 5위에 올랐어요. 그러다 태광산업 감독직을 4년 정도 하고 1990년도에 여자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했어요. 1991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청소년배구선수권에 나가 5위를 차지했고요. 행복했던 시절이었죠.
Q. 감독님의 지도자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힘을 준 지도자분이 계신다면요.
오늘날의 제가 있기까지 세 분이 계세요. 중학교 때 지도를 받은 이강평 선생님, 대신고에서 가르침을 받은 박대희 선생님 그리고 이창호 감독님이죠. 이 세 분은 제게 지팡이 역할을 하신 분들이에요. 지금 모두 살아계신데, 제가 제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늘 죄송할 따름입니다.
“김연경은 위대한 선수”
“런던 때 느낌이 이상하더라”
Q. 감독님은 어떤 지도자이신가요.
흔히 덕장이라고 하는데, 저는 공과 사가 분명합니다. 훈련할 때는 정말 타이트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뿔 달린 동물을 잡아당기려고 하면 안 되죠. 이해를 시켜가며 선수들을 가르치고 훈련은 힘들게 하죠(웃음). 또한 70대에 접어든 꼰대지만 늘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신뢰를 주려고 합니다.
명령, 지시가 전부는 아니죠. 선수들을 이해시키고, 감독을 믿고 따라올 수 있게끔 힘을 줘야 하고요. 저도 옛날에는 잔소리가 많았어요. 그런데 소리 안 지르고 선수들을 가르칠 수 있고, 체벌 없이 잘 가르칠 수 있어요. 리더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Q. 지금까지 여자부에만 몸을 담고 계십니다. 남자부 지도 생각은 없으셨나요.
생각을 못 해봤어요. 저는 여자 선수들의 특성을 살리고 싶었어요. 여자 배구는 리듬의 경기, 조직력의 배구에요. 여자 배구만의 묘미가 있어요. 또한 남자 쪽에서는 여자부 감독들을 잘 안 쓰려고 해요. 여자부 지도자들이 남자 배구에 가면 남자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굵은 선을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네요.
Q. 감독님께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을 공부하고 연구하신다고요.
배구에는 공격 방법만 626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선수들은 잘하는 것만 하고 편한 것만 하려고 해요. 리베로를 제외한 전 선수들이 공격을 할 수 있어요. 아포짓 선수들이 윙스파이커 공격을 할 수 있고, 윙스파이커도 아포짓 공격을 할 수 있어요. 또한 모든 선수들이 언제든지 이동 공격을 할 수 있고요. 조금 안타까워요. 그리고 김연경, 양효진, 김희진, 김수지, 정대영, 한송이 등 장신 선수들이 이제는 나오기 힘든 시점이에요. 한국적인 특색 있는 배구를 만들 때가 왔어요. 지금 여자배구는 기로에 서 있어요. 프로 리그도 마찬가지고, 세대교체를 통해 장기적인 플랜을 짜야 해요. 모든 선수들이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야죠.
Q. 지금까지 지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요.
김연경 선수죠. 2005년도에 제가 김연경 선수를 처음 성인 국가대표로 발탁했어요. 당시 일본에서 대회가 있었어요. 나고야 관광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세계적인 에이전트가 10명 넘게 왔어요. 일본 언론도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유망주가 나왔다고 연신 기사를 쏟아냈어요. 정말 대단한 선수에요. 김연경 선수는 훌륭한 선수가 아니에요. 위대한 선수입니다. 김연경 선수는 한국 여자배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선수입니다. 일반 선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김연경 선수 자서전인 ‘아직 끝이 아니다’에 제가 머리말을 써줬는데 위대한 선수라고 표현했어요. 늘 한국 배구에 관심을 갖고 있고, 어떻게 하면 후배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선수가 김연경 선수입니다.
Q. 런던올림픽 4강은 감독님이나 그때 뛰었던 선수들은 물론이고 많은 배구 팬들에게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인데요. 감독님께서도 그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실 것 같습니다.
2008 베이징올림픽 티켓을 따지 못하면서 제가 배구협회 전무이사직을 자진사퇴했어요. 그러다 2011년에 다시 기회가 왔죠. 결국 2012 런던올림픽 티켓을 따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는데, 당시 협회도 마찬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한 팀만 이기고 오라 했어요. 우리는 죽음의 조였잖아요. 세르비아, 브라질 등이 속해 있는데 우리가 절대 이길 수 없죠. 그런데 브라질을 3-0으로 이겼잖아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죠.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어요. 의욕, 열정이 좋았죠. 선수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뤄진 셈이죠. 사실 동메달 못 따면서 역적이 되었지만(웃음), 36년 만에 4강 올라간 것도 행운이었죠.
일본과 동메달 결정전을 가졌는데, 우리에게는 결승전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그날따라 느낌이 이상한 거예요. 미신을 믿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어요. 잠을 못 잔 것처럼요.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기상하고 6시부터 운동을 해요. 런던에서도 와이프와 매일 아침 통화를 했는데 동메달결정전 경기 날에 와이프 전화가 안 왔어요. 늦잠 잤다는 거예요. ‘어, 이거 느낌이 이상하다’라고 했죠. 그리고 버스 타는 선수들을 보는 데 (한)유미 가방이 엄청 큰 거예요. ‘유미야, 가방이 왜 이렇게 크냐’라고 물어봤어요. 유미가 ‘오늘 시상식 해야 되잖아요’라고 하는 거에요. 선수들은 이전처럼 일본을 이길 거라 생각했던 거죠. 김칫국을 먹었죠. 그리고 경기를 딱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겠는 거예요. ‘그냥 이럴 줄 알았으면 (이)숙자로 도박을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많은 선수들이 ‘사니 언니가 일본에 강합니다’라고 하고, 코치들도 ‘일본이 분석을 잘 한다. 8강 이탈리아전 때는 숙자로 해서 이겼으니 이번에는 사니 넣읍시다’라고 하더라고요. 0-3으로 질 것 같았으면 숙자를 넣어 패할 걸 그랬어요(웃음). 그런데 이 모든 건 결국 감독 책임입니다. 제가 귀국 후 인천국제공항에서 그랬어요. ‘우리 선수들은 의외의 성적을 거뒀고, 정말 잘했습니다. 모든 건 감독 책임입니다. 우리 선수들은 정말 잘 했습니다’라고 했어요. 제 생애 기억에 남는 경기이면서 많이 아쉬운 순간이기도 하고요.
김형실 감독의 머릿속은 온통 ‘배구’
“말년은 유소년 배구 발전을 위해”
Q. 페퍼저축은행 내에서 감독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선수단 버스를 안 탑니다. 감독, 코치들은 다 카니발 타니고 다닙니다. 과거에 느꼈던 게 이겼을 때는 덜한데, 졌을 때는 선수들이 감독 눈치를 봐요. 숨도 못 쉬어요. 그때 제가 맹세를 했어요. 여유가 있고 하면 선수들과 따로 다니겠다고 결심했어요. 감독, 코치가 다 버스에 있으면 꼼짝 못 해요. 그리고 우리 스태프들은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격주제 외출, 외박을 실시해 선수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고요. 외출·외박 시 귀소 시간도 8시에서 10시로 늘렸습니다. 8시에 들어와야 하면 막 오후 4시, 5시부터 들어가는 거에 대해 스트레스 받거든요. 코치, 주장에게도 법인 카드를 제공했고요. 신인 선수들은 다양한 자격증을 딸 수 있게 격려하고 있고요. 남들과 다르게 가려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Q. 페퍼저축은행 부임 후 할바리니, 아따맘마의 아빠로 닮은 꼴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한 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에 감독된 것도 감사하고요. 여자배구 발전을 위해, 그리고 팬들을 위해 조직력 있는 배구를 보여주고 싶어요. 팬들은 냉정해요. 잘못하면 인기는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으로 떨어집니다. 좋은 집이 아니라 튼튼한 집을 지어 팬들과 언론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기 안 죽고 미치고 신나는 배구를 하고 싶어요. 연패를 해도 웃으면서 격려하고, 분위기 안 상하게 하려고 하고요.
이미 해야될 일들을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인 재계약 혹은 트라이아웃도 대비를 해야 하고 국내·외 전지훈련, KOVO컵 준비, 신인 드래프트 등을 다 알아보고 있고요. 또한 일찌감치 리모델링에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박은서도 빨리 수술을 받게 한 것이고요. 구단과 협의해 지민경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자해서 수술을 시켰고요.
Q. 페퍼저축은행 와서 많은 선수들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떤 선수의 기량이 가장 늘었다고 보시나요.
모든 선수들이 발전했어요. 어느 누구도 30경기를 주전으로 소화해 본 적이 없잖아요. 우리 선수들은 다 쌩쌩합니다. (박)경현이도 힘들 텐데 아픈 티를 내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철의 경현이라 불러요. 이제는 조금씩 프로팀의 면모를 갖춰야죠. 현대 스포츠는 투자에 비례해요. 내용 있는 배구를 만들어야 하고, 또 거포나 에이스가 없는 배구를 하면 경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선수들 기량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해야죠.
Q. 페퍼저축은행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조직력 있는 배구를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늘 말하는 3S가 있잖아요. Strong, Speed, Smart를 심어줘야죠. 배구와 마찬가지로 땅에 떨어지면 안 되는 배드민턴, 세팍타크로 같은 종목은 리듬이 중요해요. 리듬감 있는 배구로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Q. 1975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감독님 스스로 되돌아 봤을 때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큰 이슈는 내지 못했고, 큰 성공을 하지 못했어도 오래 했잖아요. 신뢰를 바탕으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프로 원년 우승이나 실업리그에서 차지한 우승 밖에 내세울 건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Q. 감독님의 머릿속에는 배구밖에 없다는 걸 인터뷰를 통해 느꼈습니다.
지금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아카데미가 한 번 개최됐으면 좋겠고요. 많은 감독들도 이야기하고 있고, 박기원 감독도 좋게 생각하더라고요. 세미나 형식으로 지도자들의 생각과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실업배구연맹 활성화, 배구 발전, 대한민국배구협회 전용 클럽하우스 등을 생각하고 있어요. 클럽하우스가 생기면 각종 연맹이 거기에 모두 모여 일을 할 수 있고 유소년, 청소년, 성인까지 모두 모여 훈련을 할 수도 있고요. 언젠가는 이 감독직을 내려놓는 날이 올 텐데 그 이후에는 자진해서라도 유소년 배구 발전에 힘을 주고 싶어요. 유소년 코치나, 초등학교 배구 지도자들에게 많은 부분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Q. 감독님께서는 어떤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늘 마지막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이나 많은 선수들에게 ‘김형실 배구는 이렇구나’라는 걸 남기고 싶어요. 저에 대한 배구의 얼을 남기고 싶습니다. 건강이 되는 한 배구 발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글. 이정원 기자
사진. 문복주·박상혁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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