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발리볼데이트를 통해 배구 인생을 묵묵히 개척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인하대 배구부를 이끌고 있는 최천식 감독은 배구선수의 아들로 시작해 어느새 배구선수의 아버지가 됐다. 이제는 제자들과 함께 쓰는 인하대 체육관 그리고 체육관 앞 중국집은 약 42년간 세월을 함께 견뎠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는 의리파다. 최 감독이 걸어온 배구 인생 스토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배구선수의 아들, 최천식
1965년생 최 감독은 배구선수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부산 남성여고와 실업팀 동일방직에서 아포짓으로 활약한 박춘강 씨다.
이미 중학교 진학하기 전에 최 감독의 키는 172cm였다. 175cm의 어머니와 고작 3cm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당시 흔치 않은 장신으로 인해 농구선수 제안을 받기도 했다. 농구부 감독이 집까지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배구였다. 어머니를 따라 배구 훈련장에 다니면서 눈에 띄었고, 어머니도 아들이 배구공을 잡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배구선수 어머니에 이어 아들도 똑같은 길을 걷게 됐다. 인하사대부중 2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한 그는 1년 뒤 192cm까지 성장했다. 배구하기에 ‘딱 좋은’ 키였다.
배구선수 최천식①
최 감독은 인하사대부중-인하사대부고를 거쳐 인하대로 진학했고, 1987년 대한항공에 입단했다. 이후 2001년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선수 시절 맡은 포지션은 미들블로커와 아포짓으로 알려졌는데 윙스파이커로도 뛴 적이 있다. 인하대 ‘84학번’인 그는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 발탁돼 윙스파이커 역할을 맡았고,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고도 윙스파이커를 경험했다. 당시 한국 배구계에서도 장신 윙스파이커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권유를 받은 최 감독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다.
1984년부터 ‘백구의 대제전’ 막이 오르면서 ‘코트의 귀공자’라고 불린 그의 인기도 식을 줄 몰랐다. 그 직전에는 한국 여자배구대표팀이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메달을 획득했고, 남자배구대표팀은 1978년 세계선수권 4강 진출에 성공하며 세계 강호의 면모를 드러냈다. 팬들의 시선은 배구로 향했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94년까지 대통령배전국남녀배구대회가, 1994년부터 2003년까지는 한국배구슈퍼리그가 펼쳐지면서 이른바 ‘백구의 대제전’이 호황기를 맞았다.
최 감독은 “난 중학생, 고등학생 팬들이 많았다. 그 때 당시 배구 인기는 어마어마했었다. 전주, 부산, 대전, 광주 등 지방을 다니면서 경기를 했는데 버스도 제대로 못 탈 정도였다”며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배구선수 최천식②
최 감독은 1984년부터 1996년까지 국가대표 최천식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 출전했다.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특별한 추억도 쌓았다. 당시 한국의 개막식 기수로 선정된 것. 최 감독은 “그 때 당시 뒤에서 ‘빨리 가라’,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 등 정신이 없었다. 대기 시간도 굉장히 길었다”며 솔직하게 말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경험한 국제대회는 그를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최 감독은 일단 큰 키와 더불어 다부진 몸을 만들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세계의 벽도 높았다.
그는 “1984년 LA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배구의 흐름이 바뀐 것 같다. 이전에는 구소련 중심으로 높이의 배구를 했다. 블로킹이나 높게 올려놓고 때리곤 했다. 그런데 LA올림픽부터 미국이 우승을 하면서 기술이 많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한국, 일본 등 동양에서 선보였던 기술을 해외에서도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배구대표팀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본선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무려 20년 넘게 올림픽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 감독도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남자배구가 인기를 떠나서 몸값의 거품이 심하다. 한국 선수들이 세계에서 연봉을 가장 많이 받는다. 대표팀을 구성할 때도 프로 선수들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각팀 에이스들은 비시즌 몸을 만들 시기다. 하지만 대표팀에 차출되면 소속팀에서의 시즌 직전 훈련량을 소화해야 한다. 선수한테는 마이너스다. 대표팀에 들어가면 경제적 보상도 안 되다보니 당연히 꺼리게 된다. 동기부여가 안 된다. 이런 부분이 개선돼야할 부분이다”며 남자배구의 현실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배구감독 최천식
2001년 최 감독은 대한항공 소속의 선수이자 플레잉코치를 맡았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사이에서 조율 역할을 해야만 했다. 쉽지 않았다. 최 감독은 당시 만 나이로 36세였다.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2001년 슈퍼리그를 끝으로 기나긴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김포공항에서 카운터 업무를 시작했다. 약 6개월 이후 다시 기회가 왔다. 대한항공 감독대행을 맡은 것. 감독대행으로 한 시즌을 보낸 뒤 새로운 사령탑이 선임됐고, 그렇게 2002년 대한항공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최 감독은 학원 사업을 시작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도중 인하부중 정식 교사가 됐다. 하지만 2005년 4월 문용관 전 감독이 대한항공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최 감독이 인하대 새 감독이 됐다. 바로 2006년 인하대는 역대 사상 첫 5관왕을 달성했다. 춘계대회, 추계대회, 전국체육대회, 종합선수권대회에 이어 전국대학배구 최강전에서 모두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 중심에는 세터 유광우(대한항공), 김요한 등이 있었다. 2007년에도 인하대는 4개 대회 우승컵을 휩쓸며 대학배구 최강팀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렇게 인하대 감독으로만 어느덧 18년째다. 그동안 함께 했던 선수들은 모두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유광우는 최 감독의 아픈 손가락이이다. 그는 “제일 미안하다”고 했다.
유광우는 2007년 대표팀에 발탁됐지만 오른 발목을 다쳤고,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 인하대 팀에 복귀해 경기를 소화했다. 바로 2007년 V-리그 드래프트에 나섰다. 대한항공행이 유력했다. 현 KB손해보험인 LIG손해보험에서 전체 1순위로 김요한을 지명했고, 삼성화재가 2순위로 유광우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유광우는 프로 입단 이후 발목 수술을 받았는데 의료사고가 났고, 여전히 유광우는 주 1~2회 주사 치료를 받고 있다. 최 감독이 유광우를 떠올린 이유다.
대학배구 현장에서의 트렌드도 바뀌었다. 최 감독이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부분도 달라졌다. 그는 “이제 선수들은 무조건 수업을 들어야 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 훈련이 진행된다”며 “선수들에게 시간을 잘 쓰라는 말을 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예전보다 자유는 더 얻었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커진다”며 당부의 메시지를 전했다.
배구 해설위원 최천식
인하대 배구 감독은 18년째, 배구 해설위원은 19년째 이어가고 있다. 현 이세호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의 권유를 받았고, 테스트를 받고 시작을 하게 됐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때 당시 모 감독은 “최천식은 마이마이 카세트랑 과자만 주면 하루 종일 혼자 있을 수 있겠다”고 말할 정도로 조용했다. 해설위원을 맡으면서 늘기 시작했다. 현재 최 감독은 디테일하고 분석적인 해설로 호평을 듣고 있다. 오히려 제자들이 뛰고 있기 때문에 보다 솔직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배구선수의 아버지, 최천식
최 감독의 아들과 딸도 배구선수다. 배구선수의 아버지다. 아들 최정원은 현재 인하부고 3학년 198cm 공격수다. 딸 최현진은 선명여고 1학년에 재학 중인 178cm 세터다.
아버지로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최 감독은 “배구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해줬으면 한다”면서 “딸은 욕심이 많다. 공격수하기에는 애매한 키라서 본인이 스스로 세터를 하겠다고 하더라. 야무지다. 아들은 독기가 없다. 날 닮은 것 같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본인 스스로를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아빠, 잘 볼 수 없는 아빠, 체육관에서 더 많이 보는 아빠”라고 했다. 그리고 배구 코트에서 늘 시간을 보내는 최 감독이지만 아들과 딸이 코트 위에 섰을 때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또 다르다.
글. 이보미 기자
사진. 박상혁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7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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