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은 운명이었다” 20년 차 베테랑 최재효 심판[이보미의 발리볼데이트]

이보미 / 기사승인 : 2022-09-05 18: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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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차 베테랑 최재효 심판이 주인공이다. 선수의 꿈을 키워가던 그에게 일찍 좌절이 찾아왔다. 다시는 배구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심판으로서 다시 코트에 나섰고 또 다른 꿈을 키워갔다. 여전히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이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세터 최재효의 꿈
최재효 심판에게도 선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구공을 만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중학교 진학 후에는 학업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배구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다시 배구 선수가 됐다. 포지션은 세터였다. 졸업 뒤 실업팀 입단에 성공했다. 서울시청 소속이었다. 국가대표가 되는 꿈을 간직한 채 실업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1995년 서울시청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수로서의 도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최재효 심판은 “그 시절을 돌아보면 부족투성이였다. 욕심만 앞섰던 것 같다”며 선수로서의 자신을 기억했다. 그는 “매우 아쉬웠다.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 선수들한테 밀렸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선수 생활에 미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때 당시에는 다른 실업팀으로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전력, 대한항공 등에서 뛰는 선수들이 부럽기도 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인생 제2막을 준비해야 했다.

2002년,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
갑자기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뒤 막막했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정글 같은 사회에 뛰어들었다. 운동선수의 비애를 실감했다. 유니폼을 벗은 뒤 사업가로 변신했다. 비디오 가게를 열었다. 쌀장사도 해봤다. 부동산 관련 일도 했다. 그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배구의 끈을 아예 놓은 건 아니었다.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코치로 3년을 지냈다. “답답한 마음이 컸다. 내가 과연 뭘 좋아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를 찾아서 헤맸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연이 닿는 일들을 많이 했다. 경험을 많이 쌓았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좋은 자양분이 됐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부산에 살고 있던 그에게 2002부산아시안게임은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 최재효 심판은 봉사활동으로 대회에 참여하게 됐다. 볼 보이와 마퍼를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국제 경기를 직접 눈으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배구 심판들도 눈에 들어왔다. 당시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그는 “만약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다면 국제심판인 아빠도 괜찮을 것 같다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고, 그렇게 심판에 입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결심을 마친 그는 대한배구협회에서 매년 열리는 심판강습회에 참가해 심판 자격증을 획득했다. 이후 국내 아마추어대회에 선심으로 나섰다.




베테랑 심판이 전하는 진심
얼떨결에 시작한 배구 심판이라는 업이 어느덧 20년을 채웠다. 이제는 베테랑 심판이다. 최재효 심판은 장수의 비결을 묻자 “20년을 하게 된 건 운명이다. 배구를 보는 게 좋았고, 배구장에 갔을 때는 고향에 간 것처럼 반가웠다”면서 “마침 2005년에는 프로배구 V리그가 출범하면서 기회를 얻었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대중들은 잘한 것보다는 못하는 것만 기억하겠지만 심판은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심판의 숙명이다. 그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여겼다. “선심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라도 놓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을 못 잤다. 나 스스로에 화가 났다. 그럴 때마다 심판이 내게 잘 맞는 것인지 고민도 많이 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곤 했다”며 “산책, 등산을 많이 한다. 음악도 듣는다. 배구 생각을 지우기 위해 책이나 영화를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인문학 강의가 담긴 영상 콘텐츠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최재효 심판은 심판 양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많은 심판 가운데 국제심판은 14명이 있다. 최근에는 대륙별 심판도 새로 생겼다”면서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듯 심판도 마찬가지다. 각 나라를 대표해서 나가는 만큼 각국 리그의 수준이 높아야 심판 수준도 높아진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 이란 심판들의 수준이 높다. 이탈리아 심판들도 자부심이 높은 편이다. 유럽챔피언스리그 안에서도 유럽 각국의 심판끼리 경쟁한다. 파이널 라운드에 올라간 심판이 탑 클래스다”고 설명했다.

2022 VNL서 확인한 세계배구
최재효 심판은 2022 FIVB VNL 남자대회 심판으로 일본 오사카도 다녀왔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세계배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기술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 스피드 배구는 동양에서만 했다. 지금은 일본, 한국보다도 미국, 프랑스가 훨씬 빠르다. 수비도 블로킹 능력과 위치선정이 좋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스피드 배구를 하면서도 그 안에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 변화에 우리 배구가 근접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힘줘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진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최재효 심판은 “잘하는 팀들은 사전에 경기를 세밀하게 분석한 뒤 전략적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계산이 돼 있다. 공에 대한 애착도 대단했다. 세계 탑 클래스 선수들도 몸을 사라지 않는다”며 “백어택도 보통 가운데나 라이트에서 했는데 지금은 위치를 세분화해 다양한 지점에서 공격을 펼친다. 세터가 올리는 공도 일률적으로 빠르게만 가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스피드와 높이, 각도를 다르게 잡는다. 기술이 상당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린다
그는 첫 주심 대에 올랐던 순간, 국제심판으로 첫 대회에 나갔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년 차 베테랑 심판이지만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것이다. 최재효 심판은 “심판이 된 뒤 첫 목표가 VNL 이전에 있었던 국제대회인 월드리그 심판이 되는 것이었다. 올해 VNL에 참가하면서 이 목표는 이뤘다. 이제 올림픽에 나가고 싶다. 이를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또 다른 목표를 털어놓았다.

물론 이 같은 목표설정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최근 국내 심판들이 많이 사라졌다. 심판을 직업으로 하려는 친구들이 많지 않다. 심판도 존중받는 직업이라는 걸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며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후배심판을 향한 애정도 드러냈다.

사실 이전까지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스스로 채찍질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갑상선 암을 겪고 난 뒤 가치관이 바뀌었다. 삶을 포용하는 새로운 자세를 갖게 됐다. 미래의 최재효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남겼다. “니는 할 만큼 했으니, 배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해보는 건 어떻노.”

글. 이보미 기자
사진. 유용우 기자

(더 자세한 이야기는 <더스파이크> 9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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