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 향해 날자’ 대한항공 정지석이 바라보는 그곳

강예진 기자 / 기사승인 : 2021-03-29 01: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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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호 이후 약 2년 9개월 만이다. 2021년도 <더스파이크> 3월호 표지 모델로 정지석이 선정됐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정지석은 ‘성숙’ 그 자체였다. 실력은 물론 멘탈까지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순위 다툼이 치열한 지금, 대한항공의 고공비행을 이끌고 있는 그를 만나러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대한항공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량 물오른 올 시즌
바탕엔 달라진 마음가짐


“사복 두 벌에 유니폼 한 벌? 표지 모델 아니야?”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정지석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았다. 그는 “사실 사복 두 벌에 유니폼 한 벌을 준비하라고 했을 때, 표지라고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했어요. 잡지 사서 준다고 해서 대량 구매하려고요”라며 웃었다.

2018년을 떠올린 그는 “그땐 우승도 하고 제가 ‘빵’ 떠서 물 들어올 때 노 저었던 시기였고, 지금은 평소대로 열심히 하는 시기랄까”라면서 “2~3번 정도 표지 모델을 하는 선수도 있잖아요. 저도 더 잘해서 앞으로도 찍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라며 은근슬쩍 말했다. 당시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자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유심히 살펴봤다.

“찍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에요. 8년 차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고, 제가 지금까지 잘하고 있으니 인터뷰도 할 수 있구나...‘아직 죽지 않았구나’라고 해야 하나(웃음)? 어려서 이런 말 하는 게 형들한텐 귀엽게 보일 수 있지만 꾸준한 게 쉽지 않으니까요.”

54.05%-55.28%-55.85%-55.95%. 2017-2018시즌부터 2020-2021시즌(3월 28일 기준)까지 정지석이 기록한 공격 성공률이다. 수치가 증명하듯 성장은 현재 진행형이다. 끝을 모르는 정지석의 성장과 함께 팀 성적 또한 연일 고공비행 중이다. 그는 “팀이 1위를 하고 있고,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엔 선수들 간 호흡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큰 것 같아요. 원래 대한항공은 선수 개개인의 이름값이 크잖아요. 실력은 좋은데 범실은 많았고, 개인 성향이 강한 팀이어서 ‘안되면 내가 해결해야지’라는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팀워크가 훨씬 좋아졌어요. 이 부분이 큰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변화의 시작은 새 사령탑의 선임이다. 2020년 6월, 이탈리아 출신 산틸리 감독이 V-리그 최초 외국인 감독으로 대한항공에 부임했다. 외국인 감독인 만큼 화제성도 컸다. 선수들에게 직접 이탈리아 파스타를 만들어 준 적도 있다. 정지석은 “감독님께서 인터뷰를 하시면 ‘파스타 맛이 궁금하면 놀러 와라’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걸 보면서 ‘가까이에 있는 우린 안 챙기시나?’라고 생각했어요”라며 장난스레 말하면서 “만들어주신 걸 먹은 적이 있는데, 이태리 파스타는 달랐어요. 우리가 평소에 먹는 파스타가 아닌 거의 생면…(웃음). 갑자기 감독님께서 ‘지석아 투자해라. 얼마짜리 같냐’라고 하시길래 3만 원 정도 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라며 웃었다.

시즌 초반 이탈리아인 특유의 감정 표현과 리액션 등으로 심판의 제재를 받기도 한 산틸리 감독이다. 경기 중 잦은 항의 때문에 레드카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에 정지석은 “확실한 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는 분이에요. 감독님이 카드를 받으면 우리도 괜히 성질나고,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코트 밖에선 정말 신사 같은 분이에요. 팀에 관련된 모든 부분에 있어 애정도 크시고요”라고 말했다.

처음 맞이하는 외국인 감독에 정지석도 바짝 긴장했다. “외국에서 지도하셨던 분이 오신 거잖아요. 테니스로 치면 서브와 발리(테니스의 한 기술로 공이 바운드하기 전 라켓으로 타격해 반대편으로 넘기는 기술을 말함) 기술처럼 서브와 블로킹을 강조하셨어요. 그리고 선수들에게 전체적인 실력보다는 자잘한 부분이나 배구 센스나 눈치? 스마트한 걸 요구하세요. 예를 들면 이단 연결이나 블로킹 커버 시스템이요. 3인 블로킹을 강조하시는데 컵대회 때 잘 통했거든요. 블로킹의 중요성이 좀 더 부각되는 시즌인 것 같아요.”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현대 배구에 맞는 배구를 가르쳐주시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보통 한국 배구를 잘 아는 분에게 ‘대한항공 주전 선수는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이름 있는 선수들을 말할 텐데 외국에 있다가 오신 분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 이제는 눈도장을 받아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박기원 전 감독님이 계실 땐 안주하던 게 있었어요. ‘몸이 안 좋네’라고 생각해도 뛸 거란 보장이 있었어요. 믿음이 지나치면 독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산틸리 감독님 오시고 나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어요. 비시즌 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본 적이 없어요. 코로나19로 대표팀 소집도 안 해서 이번 시즌 몸 만들 시간이 충분했어요. 준비를 잘했기 때문에 올해 유독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해요”라고 이야기했다.

정지석은 올 시즌 첫 경기부터 훨훨 날았다. 우리카드와 개막전에서 개인 통산 한 경기 최다인 34점을 올렸고, 블로킹만 11개를 잡아냈다. 11개는 V-리그 남자부 역대 한 경기 개인 최다 타이기록이다. 이선규를 비롯해 하경민, 윤봉우, 방신봉이 한 번씩 거쳐 갔다. 의미 있는 건 미들블로커가 아닌 윙스파이커로서는 최초라는 점.



당시를 떠올린 정지석은 “첫 경기를 잘 푼 덕에 이번 시즌 자신감이 컸어요. 스타트가 좋았잖아요. 8년 동안 느낀 건 첫 경기를 잘하면 그 시즌이 술술 잘 풀린다는 거예요. 물론 기복을 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몸이 만들어졌고, 준비가 잘 된 상태였어요. 부상도 없었고요. 블로킹 11개라…저도 그렇게 많이 잡을 줄 몰랐어요. 그땐 상대 아포짓이 외인이 아닌 국내 선수다 보니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았어요. 그 덕도 있었고, 감독님께서 전략을 잘 짜주셨어요. 작전대로 움직이다 보니 잘 맞았던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했다.

기복 없는 선수는 없다. 정지석도 마찬가지. 다만 경기가 끝난 후 정지석의 기록을 살펴보면 평균치다. 정지석을 바라보는 배구인, 그리고 팬들은 ‘언제나 제 몫은 해주는 선수’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정지석은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초반에 풀리지 않아도 항상 믿고 올려주는 선수 형, 잘되게끔 옆에서 도와주는 승석이 형, 은렬이 그리고 유효 블로킹으로 인해 반격 기회를 마련해주는 미들블로커까지. 제 기록은 동료들이 만들어준 거고, 그 사람들이 있기에 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건 겸손한 게 아니라 진짜예요. 제가 팀 덕을 크게 보는 것도 있죠. 이렇게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보고, 좋은 선수들이 많은 팀에 있지 않았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지 않을까요?”

정지석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막내같은 건 기분 탓일까. 아마 팬들도 그의 ‘막내스러움’에 동감할 듯하다.

정지석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한결같다는 의미잖아요.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서 인상을 쓰는 것보단 더 집중하려고 해요. 근데 제 눈모양 자체가 좀 처져있어서 인상 쓰는 것처럼 보일 순 있을 것 같아요(웃음). 연차가 쌓여도 화내지 않고 한결같이 하고 싶어요.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고요. 그렇다고 막 허세나 무게 잡고 싶진 않아요. 후배들이랑은 거의 친구 대하듯 지내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국내 선수 서브 1위
서브의 시작은 토스부터


이번 시즌 대한항공은 대부분 경기를 외국인 선수 없이 소화했다. 지난 시즌부터 함께했던 비예나가 부상으로 주춤했고, 중도 하차했다. 대체 외인 요스바니가 합류하기까지 시간도 걸렸다. 공격 비중이 높은 외인의 이탈이 팀에 치명타로 다가올 수 있었지만 대한항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연승을 이어갔고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밑바탕엔 조직력이 자리했고, 단단해진 정지석의 책임감도 작용했다.

정지석에게 이번 시즌이 특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외인이 없었던 게 선수들 기량을 향상해 준 원동력이라 생각해요. 팀 적으로 잘 뭉쳤어요. 한 번 이겼을 땐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겼을 땐 ‘우리 되는데?’ 연승이 이어져 갈수록 ‘이게 우리 실력이네’라고 의심이 사라졌고, 자신감도 올랐었거든요”라고 답했다.

자연스레 공격 점유율도 높아졌다. 지난 시즌(20.70%)보다 3% 가까이 상승했다(23.69%). 30%를 웃돈 경기도 허다했다. 1월 15일 KB손해보험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정지석은 “감독님께 점유율을 더 가져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픈 공격에 자신도 있었고, 4~5년 전엔 수비형 윙스파이커였다면 지금은 그 틀이 깨지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윙스파이커를 ‘아웃사이더 히터’라고도 하는데 못하는 게 없어야 해요. 현대 배구에서 중요한 건 서브, 블로킹, 이단연결 등 모든 부분이고 리시브는 어택라인 근처에만 띄워 놓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스피드 배구는 미들블로커가 속공을 뜨고, 다른 공격수가 중앙 후위공격을 준비하면서 가운데를 뚫어주면 양 측면에서 빠르게 때려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가장 신경 쓰는 건 강서브에 대한 대처와 이단연결이에요. 강한 서브가 들어와도 이단연결만 잘 되면 선수 개인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잖아요”라고 답했다.

이어 정지석은 “사실 점유율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감독님께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팀의 조화가 깨질 수도 있잖아요. 그때 동혁이가 고생하고 있어서 ‘어려운 공은 내가 책임지고 때리고 싶다’라고 말하니, 감독님께서는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공이 많이 올라오면 성공률을 높이면 된다고도 하셨고요. 감독님은 개인 면담으로 긴장도 풀어주시고, 문제점도 잘 짚어주셔서 좋아요”라고 덧붙였다.

가장 눈에 띄게 향상된 수치는 서브다. 도가 텄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아직 시즌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지난 시즌 기록(세트당 0.387개, 총 43개)을 상당히 앞질렀다. 서브 2위(0.551개, 75개)로 국내 선수 중엔 꼭대기에 위치한다. 1월 29일 삼성화재전에선 한 세트 최다 서브에이스(5개)를 성공하기도 했다. 그는 “저도 확실히 (서브가 향상됐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기록을 찾아보니까 세트당 0.5개 이상이 (문)성민이 형(현대캐피탈)밖에 없더라고요. 그 기록을 깨보고 싶어요. 지금으로선 유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문성민은 2016-2017시즌 세트당 서브 0.511개를 기록했다)?”라고 말했다.



비결은 ‘토스’에 있었다. 토스를 올리고, 스텝을 밟고, 점프해서 공을 치기까지. 서브는 오로지 혼자서 만들어가는 공격 기술 중 하나다. 그렇기에 개인 능력이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산틸리 감독은 서브의 시작인 ‘토스’에 집중했다. 일정한 토스를 요구한다. 정지석은 말을 덧붙였다.

“훈련이 끝나면 저를 붙잡고 서브 훈련을 엄청 시키세요. 감독님께서는 ‘세계적인 선수들의 서브는 90%가 토스에서 정해진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유럽 선수들은 신장이 크고 힘도 있다 보니 강서브를 때려도 리스크가 적어요. 네트에 걸리거나, 아웃될 확률도 낮고요. 저는 깎아 치거나 5번 직선 자리로 때리는 등 여러 가지로 상대에게 혼란을 주고 있어요. 이건 제 생각인데, 에이스가 많이 나오다 보니 상대 선수들이 긴장해서 더 잘 먹히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면 정지석이 받기 어려운 서브를 구사하는 선수는 누굴까. 정지석은 당연하다는 듯 “러셀이라고 하면 너무 뻔한 대답이니까…”라면서 “국내 선수로는 (황)택의인 것 같아요. 완급 조절도 잘하고, 분석하다 보면 택의는 위험부담을 안고 서브를 구사하지만 범실이 적어요. 한번은 대표팀에 같이 갔을 때 일인데요. 서브 훈련을 마친 뒤에 모여서 파이팅을 하는데 택의 손이 피가 쏠려서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라며 웃었다.

정지석을 칭하는 수식어가 많다.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팀에 없어선 안 될 선수’ 등. 삼성화재 고희진 감독은 “평소 선수들에게 정지석 칭찬을 많이 한다. 신장호가 정지석처럼 세밀하게 잘하는 선수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럴수록 정지석은 더욱 고개를 숙인다. “실력 좋은 선수는 많은데 남들에게 인정받기란 쉽지 않잖아요. 인성도 좋아야 하잖아요. 거만하거나 주접떨지 않으려고 해요. 으스대다가 떨어지면 창피하기도 하고, 튀려고 하거나, 난리 치지 않아도 알아줄 사람은 다 알더라고요.”

정지석을 이토록 철들게 해던 건 2018 동아스포츠대상에서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이후였다. “선수들이 직접 투표해서 받은 상이라 더 의미가 컸어요.”


도와주고 싶은 후배, 동혁이
배우고 싶은 선배, 승석이 형


지금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슬럼프도 겪었고,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비가 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극복하려 애썼고, 지금도 애쓰는 중이다. 정지석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후배 임동혁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임동혁을 향한 정지석의 애틋함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발을 디딘 것부터 시작해 팀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점까지. 닮은 점이 유독 많은 둘이다.

“제가 동혁이 나이 때 정말 한 획을 그을 줄 알았거든요. 자만하기도 했죠. 2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경기에 뛰었고, 다친 적도 있었고, 슬럼프를 겪었어요. 그래서 지금 동혁이의 상황이 다 이해가 돼요. 물론 동혁이는 이런 걸 겪지 않고 성장하면 좋을 텐데, 기계가 아니니까 언젠가는 분명 올 거예요. 그땐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팔불출처럼 말을 이어갔다. “동혁이는 제가 22살이었을 때보다 훨씬 잘해요. 공격 임팩트가 크고, 높이도 있고요. 해외 진출도 가능하다고 봐요. 외인이랑 경쟁할 수 있는 능력 갖춘 선수고요. 전 항상 ‘내 밑으로 저런 선수는 5년 동안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예요.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고 하잖아요. 이번 시즌 스스로 기회를 잡은 동혁이를 보면 제가 3년 차였던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어디까지 클지 기대돼요. 동혁이를 발견한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평소엔 티격태격이다. 정지석이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본 임동혁은 곧장 핸드폰을 꺼내 요리조리 정지석을 찍었다. 정지석은 “찍지 마라~”라면서 이를 꽉 물었지만 임동혁은 꿋꿋하게 사진을 다 찍고 훈련을 준비하러 떠났다는 후문.



정지석은 시즌에 들어가기 전 구단에서 진행했던 ‘언택트 팬미팅 힐링캠프’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게 되면 임동혁에게 ‘에어팟’을 사준다는 공약을 걸었다. 정지석은 1월 16일 KB손해보험전에서 올 시즌 첫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공약 이행 여부에 묻자 “당시 경기가 끝나고 버스에 탔는데 동혁이가 ‘에어팟 이미 샀으니 현금으로 달라’고 하더라. 옛날 같으면 카톡으로 조심스럽게 말했을 텐데…요즘 어깨가 올라갔다”라고 웃으며 답했다.

정지석을 보면 코트 안에선 진지함이, 코트 밖에선 장난기가 가득하다. 프로 8년 차인 그에게 임동혁 외에 후배가 많이 생겼다. “밥 먹을 때 자리에 앉으면 애들이 ‘맛있게 드세요’라고 할 때 전 ‘많이 먹어’하고 자리에 앉거든요. 그럴 때 ‘새삼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후배들에겐 어떤 선배가 되고 싶을까. “사소한 이야기, 재밌는 건 같이 할 수 있는 편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처럼만 잘 지내면 좋겠어요. 힘들어할 땐 깊은 고민 상담은 아니더라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고, 꼰대가 아닌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선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지석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던 데엔 선배 곽승석의 역할이 컸다. 정지석은 2018년 5월호 인터뷰에서 롤모델로 곽승석을 뽑았다. 당시 정지석은 “승석이 형은 제 롤모델이에요. 배구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요. ‘어떻게 저렇게 창의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다는 정지석. 그는 “변함없어요. 아마 영원할 듯해요. 김종민 전 대한항공 감독님께서 저를 기용해주셨을 때, 승석이 형한테 너무 미안하고, 눈치도 보였어요. 기억나는 건 승석이형 플레이를 보고 ‘와...어떻게 배구를 저렇게 하지?’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면서 “신기하고 놀라웠죠. 그래서 맨날 승석이 형을 따라 했어요. 형은 제가 안 되고 있을 때 방관하는 게 아닌 저한테 와서 ‘이럴 땐 이렇게 해봐’하고 다 알려줬어요. 그래서 더 승석이 형 같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 멋있어요. 솔직히 아무 말 안 하고 주전에 집착할 만도 한데...아마 저는 그랬을 것 같은데 승석이 형은 달랐어요. 이래서 좋은 선배들이 있으면 강팀이 되는 것 같아요. 롤모델은 평생 승석이 형이에요”라며 힘줘 말했다.

곽승석은 2월 6일 개인 통산 리시브 정확 5,000개를 달성하기도 했다. 역대 2호 기록이다. 1호는 여오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다. 곽승석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는 정지석. “놀랐어요. 전 리시브 시도조차 5,000개가 안 될 텐데…대박…”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국가대표는 무겁고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


산틸리 감독의 가르침 속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 정지석이다. 산틸리 감독은 정지석을 두고 “재능을 갖춘 선수다. 자신이 얼마나 재능을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정지석은 흰 도화지에 본인만의 색을 칠하고 있다. 실력과 개성이 뚜렷해질수록 멘탈도 단단해져 갔다.

정지석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졌어요. 옛날엔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의기소침해하는 게 없지 않아 있었어요. 올 시즌도 경기 상황에 휘둘릴 때가 있었는데, 순간 아차 싶더라고요.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만큼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요즘에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땐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웃기만 해요. 웃으면서 하다 보면 멘탈도 잡히고, 경기력도 자연스레 올라가더라고요”라며 달라진 부분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가 무협지 소설을 자주 보거든요. 거기서 ’복수심에 사로잡히면 될 것도 안 되고 냉정해지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맞는 것 같아요. 웃으면서 차분해지면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멘탈적인 부분에서 확실히 달라졌음을 느껴요”라고 덧붙였다. 주변까지 챙길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교체로 들어오는 선수들은 얼마나 떨리겠어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잖아요. 잘 안되더라도 옆에서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하고, ‘떨리지? 더 뛰어’라고 더 소리쳐줘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고마울 거예요. 당장 오늘만 경기할 것도 아니고, 다음 경기에서도 보여줄 수 있으니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그렇게 도와주고 있어요.”

3월호가 발간될 때쯤이면 2020-2021 V-리그가 6라운드에 접어든다. 정규리그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순위표는 촘촘하게 줄을 잇고 있다. 1위 대한항공부터 5위 OK금융그룹까지. 한 경기로 순위가 요동친다. 끝까지 방심할 순 없는 상황이다.

정지석은 “우리는 우승하기 위해 계속 도망 다니는 입장이에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지만 다른 팀들이 가지는 부담도 상당해요. 우선 정규리그 우승을 해야지 외인 없이 국내 선수들로 버텼을 때 떨어진 체력을 보충할 수 있어요.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우승해야 하고, 이겨내야 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에서만이 아닌, 국제 대회에 대한 열망도 크다. 남자 배구 대표팀은 도쿄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이란에 패하며 도쿄행 티켓 확보에 실패했다. 남자 배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본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사실 전 국제 대회에 대한 열망이 커요. 자신감은 항상 있어요. 국내 대회를 평정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국내 대회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국제대회는 얼마 없잖아요. 그만큼 간절하다고 해야 하나. 형들이 가지는 감정과 마음가짐이 어떤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어렸을 땐 국가대표가 마냥 멋져 보였다면, 지금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잖아요. 그만큼 무겁고 책임감이 더 따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지난 시즌 올림픽 예선을 끝내고 국내로 복귀한 정지석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으로 힘든 모습이었다. 정지석은 “그땐 슬럼프가 왔었어요. 올림픽 본선 소집 전 한국전력이랑 5세트 경기를 하고 갔거든요. 안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대회를 치를 때도 마찬가지여서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제 위로 선배들이 엄청 많았는데, 그땐 뭔가 저 혼자 무서웠다고 해야 하나... 이란이랑 준결승할 때 너무 답답해서 울었어요. 작전타임 끝나고 코트로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엄청 고였다니까요. 꾹 참긴 했어요”라며 털어놨다.

여러 국제 대회가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면서 아쉬움이 더욱 짙었지만 정지석은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껏 너무 달려오기만 했잖아요. 오히려 정규리그에 맞춰 몸을 만들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즌 시작할 땐 ‘리그는 언제 끝날까’하고 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렸잖아요. 사람 마음가짐이라는 게 한결같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 시즌은 힘들긴 하지만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가짐도 흐트러짐이 없어요.”


자극제는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

에이스로 거듭날수록 견제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 흔히들 ‘에이스의 숙명’이라고 한다. 정지석도 마찬가지다. 그는 “분석이 되고, 견제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거기서 안주하게 되면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저는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커요.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후회하는 경기도 많아요. 더 보완하고 깨달아야 하고, 몸이 안 좋을 땐 힘들지만 최대한 이겨내려고 노력해요”라고 이야기했다.

정지석에게 자극제는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이다. 정지석은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을 보다가 누가 저보다 낫다는 말이 보이면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칭찬을 들으면 좋긴 한데, 비교하는 글이 올라오면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라는 말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이어 그는 “배구뿐 아니라 스포츠에선 승부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매 시즌 저에겐 만족이란 없어요. 사실 정규리그 MVP를 받고 어린 나이에 이룰 거 다 이루니까 정신적으로 나태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찾아낸 동기부여가 선수와의 경쟁이에요. 다시 불타올랐어요. 지고 싶어하는 선수는 없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우승과 MVP라는 성과를 거둔 정지석. 또 다른 목표를 묻자 그는 “목표는 많아요. 항상 뭐든지 최고가 되고 싶달까…”라면서 “신인일 때 욕심은 있었지만 내 분수를 알자는 마음이 컸지만, 지금은 충분한 자격이 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대기록을 세운 형들한테 좀 더 가까워지려면 일단 꾸준하게 해야죠. 배구로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다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요”라고 밝혔다.

‘선수’가 아닌 ‘사람’ 정지석이 궁금해졌다. 이 질문에 정지석은 다소 어렵다는 듯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고민 끝에 내린 답은 다음과 같다.

“20대 후반인데, 사람으로서의 저는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오만가지 생각을 해요. 배구를 잘하는 상상, 은퇴했을 때 지도자가 될까. 백수가 될까. 이런 생각이요.

어렸을 땐 개념(?)이 없다는 걸 느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인생으로 보면 됨됨이가 느껴지고, 겸손, 자기 소신이 있는 사람이 롤모델이에요. 뭘 하던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그 위치에 있는 이유를 증명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 강예진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3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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