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본인 인생에 있어선 ‘장래 희망’은 공란일 거라 생각했다. 무엇을 잘하는지, 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순간의 선택과 생각이 인생을 바꿨다. 자신이 속한 세상이 바뀌자 찾지 못했던 꿈도 마주했다. 긴 우여곡절 끝에 ‘배구선수’라는 장래 희망을 만들었고, 이젠 누구보다 열정적인 인생을 만들어간다. 배구선수 차지환이 꿈을 좇는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커리어 하이’ 시즌
“찾아온 기회를 잡아
성장했고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Q. <더스파이크>와 길게 인터뷰를 가집니다. 인터뷰를 한다는 이야길 들으셨을 때 어땠나요.
솔직히 기분은 좋았죠. 보여준 게 없으면 인터뷰 기회도 없었을 텐데 잘하고 있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Q. 현재 왼손 엄지 골절 부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손가락은 괜찮으실까요.
뼈가 부러진 거라 알아서 낫지 않아요. 훈련이랑 경기 때는 테이핑을 해서 손을 고정시켜 놓고 있어요. 시즌 끝나고 다시 한번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수술이 필요할 것 같아요.
Q. 이번 시즌 데뷔 이후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습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했을 때 과거와 달라진 점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확실히 성장했죠. 옛날부터 지금까지 연습할 때는 항상 자신 있었어요. 경기 때 보여줄 수 있느냐의 차이였죠. 옛날에는 연습 때만 잘하고 경기 때는 못 보여줬는데, 이제는 다르죠.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느껴요.
Q. 비록 레오가 아포짓으로 갔지만, 이전까지는 함께 윙스파이커로 뛰었습니다. 최고의 선수라고 꼽힌 레오와 같은 팀인 건 충분히 많은 배움이었을 텐데요.
배운 게 많죠. 저는 기술적인 부분에선 외국인 선수와 국내 선수의 좁혀지지 않는 피지컬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레오에겐 알맞는 기술이 우리에게는 아닐 수도 있어요. 기술적인 피드백을 보고 따라 하기 보단, 경기 중간에 위기 상황이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왔을 때 레오가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본인에게 자신감이 있는 게 느껴졌어요. 레오를 보면서 프로 선수라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고, 닮아가면 저도 그 순간이 오면 덤덤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하지만 레오가 다치면서 순위가 최하위에 머물던 어려운 시기도 있었습니다. 난관 속에서도 차지환 선수는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요.
솔직히 레오가 부상으로 나간 게 팀에는 악재였지만, 저한테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레오가 빠지면 누군가는 빈 부분을 메워야 하잖아요. 이를 계기로 성장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었어요.
“어릴 때요? 꿈도 없었어요.
별 볼 일 없었습니다”
Q.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많이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 배구를 언제, 그리고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했는데, 배구공을 잡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어요. 배구 감독님께서 반에서 제일 큰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보셔서 손을 들었는데, 스카웃이 되면서 그때부터 배구를 했죠. 광주문정초를 나왔는데 집은 전북이었어요. 타지에서 운동을 하니까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집을 나와서 어릴 때부터 바깥 생활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초등학교 때 제가 배구를 할 수 있게 해주신 은사님께 감사하죠.
Q. 어린 시절의 차지환은 어떤 선수였나요.
운동을 정말 싫어했어요. 지금도 힘든 운동을 하면 싫지만, 그 당시엔 더 심했어요. 부모님의 기대에 억지로 했지만, 늘 그만두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노력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선수였어요. 그러다 한 두 해 지나면서 키도 크고 잘한다고 하니 고등학교 때부터 배구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Q. 학생으로는 어떤 학생이였을까요.
성실하지 않았죠. 강의 들어가야 하는데, 땡땡이 치고 PC방 가는 놀기만 했던 학생이었습니다(웃음).
Q. 만약 본인이 배구를 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을까요.
배구를 안 했으면, 남들과 똑같이 공부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장래 희망에 아빠라고 적을 정도로 하고 싶었던 게 없었어요. 집에서 TV 보는 것만 좋아하고, 꿈도 없는 아이였어요. 하나를 끈적이게 못했기에 배구도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만약 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요.
Q. 인하대 재학 당시, 2016년 우승을 이끌면서 신인상과 MVP를 수상했습니다. 인하대학교 주 공격수로 활약했는데,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정말 좋은 감독님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최천식 감독님은 제가 한 단계 더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셨어요. 그 당시 최 감독님께서 더 많은 걸 주문하셨는데, 저 스스로 잘한다는 생각으로 등한시했어요. 지금 와서는 많이 아쉽고, ‘감독님 말을 들을걸’하면서 후회해요. 그래도 대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정말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재밌게 배구했어요. 정말 걱정 없이, 재밌게요.
Q. 대학교 2학년 때 얼리드래프트로 일찍이 프로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죠. 데뷔 초를 생각하면 어떠신가요.
대학교 2학년에 얼리드래프트 참가할 때 마음가짐은 도전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성급했죠. 그 당시에 우승도 계속하고 개인상도 많이 받으면서, ‘대학교에서 더 이룰 수 있는 커리어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멋모르고 도전했는데 교만했죠.
프로의 벽은 정말 높았어요. 높은 벽에 부딪히면서 경험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남 탓하고 ‘내게는 기회가 왜 안 오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에도 노력은 안 했죠. 못하니까 주변에서 쓴 소리를 하는데, 피하고 싶고 ‘나한테 왜 이래’라는 생각을 했죠.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댓가를 바라는 생활을 했어요. 그 당시에도 석 감독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지적을 많이하셨어요.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제가 너무 어렸고 별 볼 일 없었죠.
Q. 올 시즌 입단한 박승수 선수도 대학교 2학년 때 프로에 오게 됐잖아요. 본인 역시 2학년 때 일찍이 프로에 온 만큼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승수는 정말 기본기가 좋아서 프로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봐요. 동생이지만 배워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직 제가 누구를 가르쳐줄 입장은 아니지만, 먼저 경험을 한 사람으로 가끔씩 피드백을 줘요. 기술보단 심리적인 것에 피드백을 줘요.
프로 경기는 본인이 하는 플레이 하나하나에 눈과 귀가 정말 많잖아요. 본인이 못했을 때 들어야 하는 말을 이겨내야 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줬어요. 프로 선수가 프로에서 흔들리더라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력은 뛰어나지만 중압감을 못 버텨서 은퇴하는 선수들도 봤어요. 그래서 승수에게 제가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조금씩 알려주고 있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떳떳한 사람이 되자”
Q. 운동선수로 다소 빠르게 군입대를 하셨습니다. 입대를 했을 당시를 돌아보면 어떨까요.
군대를 가서도 달라진 건 없었어요. 모든 게 다 싫고 귀찮고, 인정 못 받는 것 같아 짜증 났어요. 제가 군대를 빨리 온 거에 불만이 컸어요. 정말 어렸죠.
Q. 군 생활을 하는 동안은 어땠나요.
군대를 들어가서 제대하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제대하고 별 볼 일 없으면 은퇴하려고 생각했어요. 책임감도 없었고 하기 싫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군 복무 당시 결혼을 했는데 와이프 보는 게 부끄러울 것 같더라고요.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부끄럽고, 제가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떳떳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이 생각이 들고 나선 제대로 해봤어요. 마음가짐이 바뀌니까 보는 것도 달라지더라고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옛날에는 왜 부정적인 말을 했을까’하고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Q. 그렇게 지난 시즌 복귀를 맞이했지만 그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제대를 하고 몸이 안 만들어졌어요. 사실 군대에 있는 동안 몸을 만들어야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제대를 하고 나왔는데, 마음은 조급하고 앞서지만 몸은 준비가 안됐잖아요. 육성군에서 훈련을 하고 경기력을 끌어올렸지만, 부상으로 그렇다 할 활약이 없었죠.
하지만 못한 게 오히려 약이 됐어요. 잘했으면 또 나태해졌을 것 같아요. 이번 시즌만큼은 준비 안됐다는 소리 듣지 말자, 정말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했어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공하는 사람들만 하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정말 노력한 만큼 돌아왔어요. 주위에선 이번 시즌 어떻게 잘하냐고 물어봤을 때 스스로한테 노력을 많이 했다고 답해요. 어떻게 보면 저 스스로에겐 당연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Q. 군대에 있을 동안 영혼의 단짝도 만나셨습니다. 흔히들 군 입대, 결혼을 하게 되면 많이 달라지는데 본인도 새삼 느낄까요.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책임감이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걸 느꼈어요. 남들한테 하는 행동이 나를 평가하는 모든 게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많이 들더라고요. 운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긍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됐어요. 와이프가 늘 좋은 말을 많이 해줘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아직은 부족하지만, 확실히 결혼하기 전보다 많이 성숙해졌어요.
“배구는 제게 처음으로
생긴 꿈이에요”
Q. 슬럼프 겪은 적이 있었을까요.
프로 2년 차까지 서브를 못 때렸어요. 입스가 왔던 거죠. 트라우마가 심해서 서브를 때리러 나가면 저를 쳐다보는 눈들이 굉장히 무서웠어요. 그 당시 서브 차례가 너무 싫어서 빨리 교체되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들었고, 탈모에 우울증까지 왔어요.
근데 이겨내는 방법이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이 순간이 오면 부딪혀서 이겨내야 하더라고요. 불안해서 범실을 하더라도 다음에 잘 때리면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요. 예전보단 많이 괜찮아졌지만 지금도 극복을 많이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도 서브를 때리기 위해 공을 들고 있으면, 손이 엄청 떨려요. 슬럼프가 굉장히 심하게 와서 배구 하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도망치듯이 군대를 갔는데,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까지 코트 위에 있게 해주는 원동력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제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이요. 이왕 배구를 시작했고, 프로까지 온 만큼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기 싫었어요. 많은 분들이 ‘키가 아깝다’, ‘생각을 조금만 바뀌면 달라질 텐데’라는 말을 정말 듣기 싫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키가 아깝지 않게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에는 인정도 받고 싶더라고요. 열심히 하면서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은 목표도 생겼어요.
Q. 배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언제인가요.
첫 번째는 아무래도 대학 시절이죠. 제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어요. ‘이런 게 성취감이구나’라고 알게 해줬어요. 그다음은 이번 시즌이요. 배구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본인에게 OK금융그룹은 어떤 팀인가요.
일단 저를 뽑아준 팀이잖아요. 집 같은 곳이죠. 모든 선수들이 그럴 테지만 프로를 시작한 팀은 남다를 거예요. 다른 곳에 있는 저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아직 팀에서 확실한 커리어를 남긴 것도 없잖아요. 그만큼 당장은 팀을 위해 헌신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배구라는 존재는?
저한테는 처음으로 생긴 꿈이에요. 뭔가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터라 대학교 때부터 프로 2년 차까지는 직업으로 와닿지 않았어요. 이제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적어야 했던 장래 희망이지 않을까요. 배구가 없었으면 제 이름을 어디에도 알릴 수 없었을 거잖아요. 고마운 존재죠.
“아버지가 하늘에서도
제 배구를 보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Q. 영혼의 단짝인 와이프에게는 무슨 말을 남기고 싶으실까요.
엄청난 정신적 지주죠. 늘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에요. 주전으로 처음 시즌을 치르고 있어서 늘 예민한데, 그럴 때마다 이해해주고 배려해줘요. 아직 제게 믿음이 없어서 경기에 들어갈 때마다 ‘오늘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으로 뛰어요. 스스로에게 물음표인데, 와이프가 항상 느낌표로 바꿔줘요. ‘잘하고 있다, 최고다’라고 이야기 해주면 힘이 나죠. 몸도 아프고 시즌도 길어지면서 정신적으로 힘들 때 마다 저한테 동기부여가 돼요. 이 사람 덕분에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해요.
Q. 가족들에게는요.
어머니가 제가 뛰는 경기는 가슴 졸이면서 잘 못 보세요. 그래도 요새는 너무 행복해하시더라고요. 어머니를 보면서 ‘왜 그동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죠. 프로 데뷔 시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요새 생각이 많이 나요. 제가 배구 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경기도 많이 못 들어가고 좋은 모습 못 보여드려서 죄송했어요. 그래도 하늘에서 지금의 절 보고 계신다면 흐뭇해하시지 않을까요.
Q. 마지막으로 팬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는 팬분들이 와닿지 않았어요. 이번 시즌을 치르면서 제가 경기를 할 수 있는 건 구단의 지원도 있지만, 가장 큰 건 팬분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 시즌 정말 많은 걸 느꼈어요. 제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도 경기장을 찾아오셔서 사진 찍어달라 하시고, 사인해달라고 하실 때 다 해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코로나 이슈로 그러지 못하는 게 정말 죄송하죠. 그리고 팬분들이 있기 때문에 프로 선수들이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 김하림 기자
사진. 더스파이크DB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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